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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Oct 16. 2023

가혹한 정복자 티무르

이슬람 바예지드 티무르를 만나다

V 티무르 7년 원정로

출처 : 스턴텔라드 작. eigen werk(자작), Marozzi, Justin(2005) Tamerlane: Sword of Islam, Conqueror of the World , Harper Perennial, 페이지 IV-V ISBN : 0007116128 에 기초함 .(위키백과)




이슬람 바예지드가 코소보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승승장구, 뜻하지 않는 복병을 만났다.


제국을 넓혀가던 중 중앙아시아에 티무르라는 강력한 도전자와의 한판 대결이 기다리고 있었다. 1402년 현재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서정西征한 티무르(Timur)와 대결은 오스만제국의 가장 큰 위기였다. 티무르, 위대한 약탈자, 도무지 끝을 알 수 없는 욕망의 화신, 단 한 번도 전쟁에서 패하지 않은 무적의 사나이, 생각과 깊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티무르에게 악의 화신이란 호칭을 붙여도 좋았다. 그가 지나간 자리는 비옥한 땅일지라도 풀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평야는 불모지로 변했다. 남녀노소 죽이는 것을 파리 목숨 같이 여겼다. 사람의 머리로 탑을 쌓았다니 그저 할 말을 잊는다. 

티무르에 침략당한 지 35년이 지난 후 이집트의 모 역사가가 기록한 바그다드 모습이다.     

 

“……화려했던 이슬람의 도시 바그다드는 폐허로 남았다. 이슬람교 사원도, 기도하는 신자도 볼 수 없다. 물과 나무들은 메마르고 수로는 막혀 기능하지 못했다. 이제는 도시라고 부를 수조차 없이 가혹한 모습이다.”     




티무르 역시 중앙아시아 대부분이 그랬듯 오아시스를 주변으로 독자적인 이슬람이 번지면서 자연적으로 스며든 이슬람을 받아들인 경우다. 14세기 후반에 시작된 가혹한 정복자 티무르는 사마르칸트 등 중앙아시아의 가장 비옥한 땅을 평정하고 30여년에 걸친 정복사업은 살육을 동반한 가공할만한 업적을 이룬다. 북쪽의 러시아국경에 걸쳐있고, 남쪽으로는 인도, 동쪽으로는 중국변방까지, 서쪽으로 타슈켄트, 테헤란, 앙카라까지 영역을 넓혔다. 그리고 서진을 이어 소아시아에 도착해 오스만제국과 대치한다.     


니코폴리스에서 십자군을 격파한 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고 있던 바예지드 1세는 급하게 동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무적의 이슬람군도 티무르에게는 어림없었다. 여기에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바예지드 1세가 지배한 토후국 지도자 중 일부는 오스만제국을 배신하고 동쪽 티무르에게 붙었던 것이다. 비非 이슬람군으로 이슬람교도, 혹은 투르크족을 죽이는 전쟁에 성전이란 이름으로 결코 동조할 수 없었던 이들이었다.


티무르(위키백과) / 그는 사람의 머리로 탑을 쌓기를 즐겼다. 정복지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약탈과 파괴 그 뿐이었다. 투항하는 적도 도살했다 한다.


바예지드의 군사 중 티무르 휘하에 자신들이 모시던 토후국 지배자가 있었다. 이들이 티무르군대에 합세하자 승패는 불 보듯 뻔했다. 양편 모두 합쳐, 뻥을 조금 보태더라도 100만이라면 당시 전투 규모로서는 상상하기 쉽지가 않다. 비잔티움을 정복하려 했던 세기의 패자 오스만제국도 티무르 앞에선 맥을 추지 못했다. 이 전투에서 빠른 기간에 제국의 영토를 확장해 ‘번개왕’이라 별호가 붙었던 바예지드 1세가 포로로 잡혀 티무르 감옥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1402년 포로로 잡힌 바예지드는 수치심에 분노를 감출 수 없어 옥중에서 스스로 목숨을 거뒀다. 그리고 화려한 문화를 향유했던 바그다드는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바예지드 1세(위키백과)

   

이때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세르비아 출신 전사들이 바예지드 1세 술탄을 위해 결사 항전했다고 전한다. 이 또한 역사가 주는 매력이자 미스터리다. 지금의 대세르비아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선조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매우 궁금하다.     



각설하고, 오스만제국을 점령한 티무르는 욕망에 불탄 나머지 역사적 오판을 범한다. 오스만제국으로서는 이만한 다행히 없었지만, 제국을 완전히 무너트리지 않았다. 뛰어난 전사로 평가받던 가지스 등 오스만 군사들을 유럽침략에 선봉을 세우려는 티무르의 욕심이었다. 서구인들로서는 천만다행한 일이 또 벌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티무르는 중국의 신생 통일제국 명나라와 협력관계를 유지했으나 힘을 확대한 후에는 하등의 그럴 이유가 없었다. 1402년 티무르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명나라를 치기 위해 사마르칸트로 향했다. 세계의 패자가 두 명이 될 수는 없다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는 티무르와 일전을 준비했으나 다행(?)이도 무위에 그쳤다. 티무르가 진군도중 졸지에 열병에 걸려 죽었기 때문이다. 그이 나이 69세였다. 죽음을 앞두고서도 명나라에 대한 원정을 멈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평생을 싸움터에서 보낸 인물치고 절명의 순간에 보인 인간성에 고개를 흔들게 한다.     


중국 만리장성 서쪽 끝 가욕관 / 티무르의 침략에 대비해 보강되었다




여기서 역사적 가정, 즉 히스토리 이프(History if)란 말이 있다. 만약 영락제와 티무르의 한판 대결이 성사되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명나라가 이겼다면? 혹시 졌다면 한반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이며, 더 나아가 임진년에 왜구의 침략은 어떻게 펼쳐졌으며, 과연 왜란이 존재는 했을까? 어쩌면 조선이란 나라는 세계에서 사라지고, 중국의 한 성으로서 전락해 조선족이라는 비굴한 소수민족의 삶을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튼 티무르가 때마침 잘 죽어주었다.     


단 한 번도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던 티무르는 사마르칸트에 웅장하고 화려한 이슬람 건축물을 세워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건축물과 회화 등 예술품을 남겼다. 이곳 사마르칸트에 복잡다단한 문화가 화려하게 꽃을 피게 한 것이 그가 이룩한 딱 하나의 업적이다. 하지만 10년만 일찍 죽었더라면 얼마나 많은 인명이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까.


그는 자신의 무덤 관 두껑을 열면 재앙이 닥칠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1941년 6월 구 소련에서 연구차 열었고, 뒤이어 독일이 바르사바를 침공함으로써 소련은 2차 세계대전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리고 관 두껑을 용접해 다시는 열지 않았다고 한다.


#티무르 #가욕관 #바예지드 #영락제 #바그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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