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지도가 변하다
A. 니콜라스 레리크 작. '바다 저편에서 온 귀객' (1901년)
동물이든 인간이든 위기에 봉착하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본능이다. 살아남기 위해, 모진 목숨 끊을 수 없어, 아무리 돌아봐도 벗어날 구멍이 보이질 않자 전사로 새롭게 태어나 무기를 든 이들이 있다. 이들을 찬양하는 게 아니다. 당시에는 만연했던, 역사를 거슬러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 그 현장에 서있다면 인식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약육강식의 세계는 인간이 가장 치열하다. 왜냐하면 약탈의 본능을 제어할 이성 따위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어서다.
인류 전쟁사에 있어 대부분 식량부족으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위대한 신, 조상의 이상, 영토 등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거대한 협력의 네트워크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냉혹한 주거의 조건에 식량부족이 더해지면서 이동한 민족이 있다. 그렇다고 순순히 이들을 받아들이는 곳은 없었다. 그러자 약탈이라는 폭거를 당연시했다. 최소한 초기에는 그랬었다.
8세기 유럽 북부, 여름이 짧고, 겨울이 긴, 춥고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다는 것은 그들을 오달지게 담금질 했다. 일 년 중 절반 이상이 우리네 오동지섣달이라고 생각해보라. 당연하게도 이들이 살던 곳은 농사를 지을 땅이 그리 많지 않았다. 여름이면 남쪽으로 이동해 가을걷이가 끝난 남쪽의 수확물을 약탈해 돌아가거나, 가을이 끝날 무렵에 내려와 추운 한겨울을 따뜻한 남쪽에서 보낸 후 다시 돌아가는 계절에 따라 선택적 이동을 이어간 부족도 있었다.
‘노르만’의 어원은 북방사람들이란 뜻이다. 이들은 주로 유럽 북부 현재의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 등 스칸디나비아반도 인근에서 살아가던 사람들로서 게르만족이 훈족을 피해 대거 이동할 때에도 악착같이 그곳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이동은 필연적으로 항해술의 발달을 가져왔고, 거친 바다에서도 항해하기 알맞은 배를 창안했다. 사람들은 이들을 바이킹이라 불렀다. 이들은 폭이 좁고 길이가 긴 롱십(longship)이란 배를 이용해 번개처럼 들려들어 노략질한 후 바람처럼 사라지는 이들은 그야말로 천하무적 해적이자, 유럽에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바이킹의 어원을 비잔티움제국 용병 ‘바랑인 친위대’에서 따온 것이라고도 한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이동하기 훨씬 이전부터 노르만족의 위용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뜻이다.
비잔티움 제국에 '바랑인 근위대가 있었다. 노르만인으로 구성된 비잔티움 황제의 근위병, 즉 비잔티움제국 황제의 명령에만 따르는 노르만족 용병이다. 비잔티움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재위 1081~1118)의 딸이자, 역사가이며, 저술가인 안나 콤네나(Anna Comnena)의 표현을 옮기자면 바랑인 근위대는 제국의 황제만을 향한 무한충성과 그 목적만을 위한 순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황제를 가족처럼 보호했다. 황제만을 위해 충성을 바쳤고, 이들의 신성한 믿음은 대를 거듭하면서 전해졌다. 이 충성스러운 자들은 그야말로 순수함을 유지했으며 배신의 사소한 징후마저도 그대로 넘기지 않았다.”
이들 바랑인은 8세기 노르만족이 남하하기 이전인 6세기부터 내려왔는데 비잔티움제국의 근위병이 된 자들은 선구자에 속한다. 거슬러 올라가면 ‘바랑기안’은 그 옛날 노르만어로 맹세를 뜻하는 ‘바르’에서 유래한다고 전한다.
비잔티움제국의 황제로서 자신만을 믿고 따르는 데는 이만한 용병이 없었다. 이들은 주로 북유럽식 전투방식을 고수했다. 친위대는 방패와 도끼를 들었는데 필요에 따라 말도 이용했다. 전투에 임했을 때 항상 선두에서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용맹한 병사들이었다. 함성과 함께 이들이 달려오는 모습을 마주하는 상대는 저승사자를 만난 듯 심장이 얼어붙었을 것이다. 얼핏 황제를 제거하려는 음모라도 엿보이면 곧바로 응징을 가해 황궁 내에서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오로지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직진하는 영화 ‘터미네이터’를 떠올리게 된다.
바실리오스 2세(재위 976~1025) 당시 이들의 활약상이 특히 두드러진다. 비잔티움제국의 귀족 바르다그 포카스란 인물이 바실리오스 2세의 불가리아 침략의 실패를 빌미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스스로 바실리우스, 즉 황제라 칭하며 비잔티움을 향해 진격했다. 급기야 반란군에 의해 비잔티움제국이 함락될 지경에 이른다. 다급해진 바실리오스 2세는 오늘날 우크라이나 키예프 공국 블라디미르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때 키예프에서 바랑인 용병 6천 명이 달려왔고, 비잔티움제국은 용맹한 이들의 도움으로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이 용병들의 용맹과 충성심에 충격을 받았다. 바랑인 용병은 귀족 출신 제국의 근위병보다 훨씬 믿음이 갔다. 그러자 북유럽에 용병모집 열풍이 불었다. 스웨덴에서 용병들의 유산을 처리하는 특별법이 생겨날 정도였다니 그 규모를 가늠하기 어렵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노르만족 뿐 아니라 켈트인, 앵글인 등 북유럽의 젊은이들이 몰려들면서 ‘켈트친위대’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반드시 성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황제에 따라 사건에 따라 이들의 운명이 좌우됐다. 특히 가톨릭에 의한 가톨릭의 약탈로 치부되는 제4차 십자군전쟁 당시 황궁을 지키던 바랑인 근위대가 원정군에게 궤멸을 면치 못했던 뼈아픈 사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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