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새해 첫날, 캄캄한 새벽의 고요를 깨트리며 알람이 시끄럽게 울렸다. 눈도 뜨지 않은 채 손의 감각만 이용하여 알람을 끄고 이불을 끌어올렸다. 포근한 이불 속 공기를 느끼며 머릿속으로는 치열하게 고민했다. ‘일어날까? 더 잘까? 매일 뜨는 똑같은 해인데 꼭 봐야 하나? 오늘 춥다던데? 날씨도 흐리다던데?’ 그럴듯한 논리에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다. ‘그래도 제주에서 맞는 새해 첫날인데.’ 이 생각이 들자, 고민이 싹 가셨다. 바로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나 준비를 시작했다.
제주에 살면 좋은 점이 있다. 어디서든 최대 1시간이면 근사한 일출을 보러 갈 수 있다는 것. 물론 육지 사람 기준이다. 제주 토박이에게 1시간은 체감상 서울에서 대전 정도의 거리라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10개월 차 이주민인 내게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그리하여 피곤함에 뻑뻑한 눈을 깜빡이며 1시간을 달려 제주 동쪽 바닷가에 도착했다. 제주에는 성산일출봉, 용눈이오름, 광치기해변 등 일출 명소라 불리는 곳이 많지만 내가 택한 곳은 성산읍 신천리의 한적한 바닷가였다. 그곳은 제주에 처음 와서 게스트하우스에 묵을 때 사장님에게 소개받은 곳인데, 잘 알려지지 않아 조용히 일출을 감상하며 새해를 시작하기에 알맞은 장소라고 생각했다.
드문드문 주차된 차들 사이, 바다를 향해 차를 세우고 일출을 기다렸다. 어두운 구름 사이 회청색 하늘이 여린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낮고 짙게 깔린 구름산을 통과한 해는 구름과 구름 사이 열린 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구름에 가려 온전히 둥근 모양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붉게 타올랐고 더없이 찬란했다. 바다는 쉴 새 없이 흘렀고, 이따금 갈매기가 시야에 들어와 역동적인 무늬를 만들고 사라졌다. 새해 첫날, 나는 고요하게 출렁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벅찬 마음을 느꼈다.
새해 첫 일출을 바라본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일출을 바라보며 벅찬 기분을 느낀 것도 오랜만이었다. 어릴 땐 새해를 맞는 건 마음이 들뜨는 일이었고, 새해 첫 일출을 보는 건 특별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1월 1일은 그저 수많은 날 중 하루에 불과해졌다. 추운 날 새벽에 일어나 일출을 보러 가는 일은 귀찮은 일이 되었다.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벅차오를 마음을 기대하기보다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피곤함, 그 순간을 위해 견뎌야 하는 추위, 수많은 인파로 인한 피로감과 같은 부정적인 것들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다. 결국 그 모든 것을 감당하며 굳이 일출을 보기보다 순간의 편안함을 선택해 왔다. 1월 1일을 매일 반복되는 특별할 것 없는 날, 새해 첫 해를 매일 뜨는 특별할 것 없는 해라고 치부해 버리며. 그렇게 스스로 나의 시간과 경험을 ‘특별할 것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니 삶에서 특별한 것도 하나, 둘 사라져만 갔다.
2026년 1월 1일은 내게 특별한 날이었다.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겨우 눈을 뜨던 내가 캄캄한 새벽에 일어났고, 저 멀리 동쪽에서 번져오는 여명을 바라보며 새벽 드라이브를 했고, 제주에서의 새해 첫 일출을 보았다. 지나간 시간을 향해 가지고 있던 한 줌 미련을 거센 바닷바람에 털어버렸고, 맑고 후련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했다. 그날 새벽, 침대에서 ‘오늘’을 특별할 것 없는 날이라고 결론지었다면 그날은 정말 그런 날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날이 특별해진 이유는 내가 그 하루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일 테다.
새해 첫날, 생일, 기념일, 크리스마스, 연말... 그 수많은 특별한 날을 우리는 어른이 되어가며 얼마나 많이 잃어왔을까? 새해 첫날 보는 일출, 기념일에 주고받는 작은 선물 하나, 크리스마스에 여는 조촐한 파티. 언제든 보고 언제든 할 수 있다고 매번 지나쳐버리면 우리 삶도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따분한 것이 되지 않을까. 평범한 날들 속에 무심코 박혀 있는 그 하루가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
그러니 매일 반복되는 지루하고 버거운 날들 속에 지친다면, 오늘 하루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보면 좋겠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특별히 맛있는 음식을 먹고,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갖고, 특별히 좋아하는 일을 해 보면 좋겠다. 특별할 것 없는 나의 새해 첫날이 특별해진 것처럼, 우리 삶도 그렇게 딱 하루씩 특별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