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딸 여 있다!

혹한기를 대비하는 불효의 연습

by 시트러스

1. 겨울을 앞두고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린다는 말이 틀렸다면,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고 존경하는, 우리 아빠의 죽음을 채비한다.


그날은 언젠가 올 것이다. 아빠의 전화벨이 더 이상 울리지 않는 하루. 언젠가부터 나는 마음속으로 아빠의 장례를 그려 왔다. 사실 꽤 오래전부터. 글쎄, 10년 전부터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겨울을 맞기 전에 난방을 점검하고, 창문 틈을 막는다. 나는 아빠의 부재라는 혹한기를 대비해,

마음에 먼저 월동 준비를 해 둔다.


2. 혹한의 꿈

얼마 전 이상한 꿈을 꾼 적이 있다.

멀지 않은 미래. 세상은 다시 얼어붙었고,

인류는 지구를 떠나기로 했다. 단 한 명만 남겨두고.

우리 집 첫째 딸, 원희가 뽑혔다. 그러니까, 이건 꿈이다.


"원희야, 가지 마아."


떠나는 건 나면서, 꿈인 줄 알면서도,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며 잠에서 깼다.

몇 년이나 지난 꿈인데도 아직도 생생하다.


3. 온기가 사라진 세

문득 깨닫는다.

모든 사람들이 닿지 않는 행성으로 떠나가고

어떤 재화나 보물도 아무런 치가 없어지는 세상.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의 내 모습이 딱 그럴 것만 같다.

아빠가 없다는 건, 온 세상이 의미를 잃는 일이었다.


상실은 아무리 대비해도 춥고, 대비하지 않으면 얼어붙는다.

나는 아빠를 잃은 뒤의 나를 얼려 죽이지 않기 위해,
지금의 따뜻함을 조금씩 저장해 두는 중이다.

내가 받을 충격은 분명 해일과도 같이 덮쳐 올 테니

나는 생존하기 위해 벌써부터, 아주 천천히 대비하고 있다.


4. 담의 저장법

한 번씩 친정에 가면 괜히 사진이랑 영상을 찍어본다.

아빠의 농담과 웃음소리를 비상식량처럼 몰래 비축한다.

주름진 손을 슬며시 잡아 들여다 본다. 우리는 길쭉한 손가락이 똑 닮았다.


아직 따뜻한데도 그 온기를 어떻게 보관할지부터 고민하는 마음.

이 계절에 먼저 겨울을 준비하는 일을, 나는 불효라 부른다.


하여, 내가 혹한기에 대비하는 방법은 거창하지 않다.

웃음 하나, 목소리 하나, 손의 온기 하나를 얼지 않게 싸서 마음 깊은 곳에 묻어 두는 일.

나는 그렇게, 딸로서의 불효를 조금씩 연습하고 있다.

연습이 길어질수록, 그날이 멀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5. 얼지 않고 자란 사람

나는 부모님께 맞아 본 적이 없다.

체벌이 훈육의 이름으로 통하던 내 세대에서 이건 드문 경우였다는 걸 안다.


그뿐일까.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마음의 온도는 늘 일정했다.

나는 온건하고 덤덤한 사랑을 받고 얼지 않는 사람으로 자랐다.


내가 학교에서 수업을 시작했을 때 엄마가 걱정을 하셨다.

"니는 돈봉투 받고 그라모 안된다."

이미 그런 시대가 아니었지만 염려가 되셨겠지.

"야는 그럴 아가 아이다." 아빠는 짧게 말씀하셨다.

나는 물론 그럴 아이가 아니었지만, 부모님이 믿어주는 아이라는 사실이 그저 좋았다.

그 믿음이, 내가 겨울을 건너는 방식이 되었다.


첫째를 임신하고 남편과 처음으로 부모님을 뵈러 간 날,

뭔가 쑥스럽고, 괜히 떨렸다. ktx역으로 마중 나오신 아버지가 한달음에 달려오셨다.

"딸, 자랑스럽다."

토닥이는 등 너머로 울리는 그 말에 가만히 어깨를 웅크렸다. 내가 받은 가장 좋은 축하 선물이었다.


6. 늘 찍은 겨울

추운 겨울, 서울에서 올리는 사촌 동생 결혼식을 보기 위해

엄마 아빠가 경상도에서 경기도 우리 집으로 올라오셨다.

이번에는 내가 마중을 나간다. ktx 플랫폼에 서자 겨울 공기가 발목부터 차올랐다.

"겨울이 이 정도도 안 추울라꼬."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 입꼬리가 괜히 올라갔다.


명절이나 생신에 맞춰 늘 우리가 내려갔기에

아버지는 10년 만에, 어머니는 5년 만의 방문이다.

그 사이 나는 세상의 속도대로 달려왔고, 두 분은 조금 느려졌다.


멀리 ktx에서 내리는 부모님.

오래된 사진 속처럼 두 분 모습은 조금 낡아 있다.


씩씩하게 다가선다.

언젠가부터 오랜만에 부모님 얼굴을 볼 때마다 용기가 필요해진다는 걸 체감한다.


아직 두 분은 정정하고 웃음이 넘치신다.

내 유머 감각의 대부분은 아버지에게서 왔다.

바리바리 싸 오신 짐 중 대부분은 사위가 좋아하는 회나 멍게겠지.

"그거 무슨 맛으로 먹노." 나는 짐짓 투덜댈 테고,

오늘 저녁에는 술에 강한 유전자들답게 신나게 술도 마실테다.


7. 축제의 예행연습

나는 축제처럼 장례를 준비한다.

술잔이 오가고, 웃음이 섞인 자리처럼.

상실의 찬 파도에 잠기기 전에 배워 두려는,

뒤에 남을 자의 예행연습이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20년, 아니 30년은 더 준비하고 싶다.

이 겨울이 길수록 좋겠다고, 나는 마음에 비상 핫팩 하나를 더 챙긴다.

"가지 마아."

떼를 쓰고 싶은 마음은 혼자만 간직한 채 멀리서 외친다.


경상도 사투리로

평소보다 큰 소리로.


"엄마, 아빠! 딸 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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