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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머 Oct 25. 2024

내 마음이 멀어지려 할 때

우리 사이가 아주 멀었고 영영 멀어질지 아닐지 모르던 시기에, 내 마음은 당신이라는 나무에 매달린 나뭇잎 같았어요. 가을이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내 마음은 작은 바람에도 한 잎 두 잎 떨어져 나갔지요. 무성하던 잎들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어요. 이러다 다 떨어지면 안 되는데…. 그렇게 나뭇가지 끝에서 내 마음이 안타깝게 대롱거리던 시기였지만, 당신은 나무답게 굳건히 서 있었지요. 적어도 내가 먼저 떠나지는 않는 거야, 나는 속으로 다짐했어요. 그러면서 속으로 당신이 발 달린 나무처럼 뚜벅뚜벅 걸어서 내게서 먼저 떠나 주기를 바라기도 했지요.      


결혼한 지 십오 년쯤 지나면 전에 없던 놀라운 능력이 생기기도 하는가 봐요. 같은 방을 쓰면서도 두 달 동안 서로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있게 됐으니까요. 나는 당신과 이야기 나누는 게 좋아서 결혼을 한 사람인데요. 말문을 트려 해도 당신에게는 입이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어요. 그대로 있을 수 없어 나는 당신에게는 아무 말도 안 나오는 나를 데리고 당신과 동네 맥주집에 다니기 시작했지요. 당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그렇게라도 만들려는 거였어요. 다행히 당신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해주었어요. 그 맥주집에는 커다란 텔레비전 화면이 몇 개 있어서 나는 관심도 없는 야구 경기에 시선을 줄 수 있어 좋았어요. 단골이 되니 점원이 아는 척해주면 그에게는 굳은 얼굴 풀고 눈인사를 했지요. 나는 맥주 500cc 한 잔으로 두 시간을 채우며 그래도 기뻤어요. 첫날에는 두 시간 동안 당신에게 말 한마디를 했잖아요. 몇 달 뒤에는 몇 마디 하게 됐고 웃기도 했어요. 벌서듯 시간을 채우지 않아도 되었고요. 맥주를 자주 마시니 허리가 굵어졌는데, 그래도 관계를 포기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어요.      


봄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어요. 뭐라도 즐거운 순간과 우리를 연결해야 했어요. 아직 겨울기운 가득했지만 우리는 멀리 있는 수목원들에 자주 갔어요. 집을 나서면 반드시 한 번은 크게 다투어서 그때부터 집에 돌아올 때까지 말을 한마디도 안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중간에 돌아오지는 않았지요. 그리고 매번 다툴 줄 알면서도 예쁜 경치를 찾아다녔어요. 어느 수목원을 갔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요. 하지만 한 장면은 또렷해요. 꽤 추운 날이었는데 처음 보는 꽃들이 차가운 땅에서 커다란 얼굴만 쑥 내밀고 있었어요. 크로커스. 유럽에서 온 보랏빛 노란빛 크로커스였어요. 나는 그렇게 마음을 녹여주는 예쁜 봄꽃들이 있는 곳에 당신과 같이 있으려고 했던 거예요.      


우리는 그해 여름이 되면 이사를 갈 예정이었지요. 곧 서울에도 봄이 왔고, 이곳저곳 동네 산책로마다 벚나무들이 하얀 꽃을 눈부시게 피워댔지요. 어느 저녁에 우리도 같이 벚꽃 길을 걸었어요. 밤하늘 어두운데 바람이 불 때마다 하얗게 벚꽃이 쏟아졌고 포장도로에서 꽃잎들이 바람에 날렸어요. 나는 가져간 작은 상자에 꽃잎을 주워 담았어요. 상자에 가득 채우고 싶었지만 작고 얇은 꽃잎은 아무리 담아도 얇게 밑에 깔릴 뿐이었어요. 화단 연석 옆에 몰려있는 꽃잎이 줍기가 좋았어요. 남들 보기 창피하다고 땅에서 뭘 줍느냐 타박하던 당신도 나중에는 내 옆에 와서 꽃잎을 같이 주워주었지요. 집에 가져다 뭘 하려는 거냐고 자꾸 타박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어요. 바람에 나부끼는 꽃잎 보기도 즐겁고, 보드라운 작은 꽃잎을 만지기도 기분이 좋았어요. 얼굴에 닿는 봄바람도 싱그러웠어요. 이건 2012년 봄이야, 꽃잎을 담으며 속으로 혼자 말했어요. 우리가 언제 영영 남남이 되어버릴지도 모르는데, 같이 산책 나온 지금 봄을 주워 담아 간직하고 싶었던 거예요. 어차피 흙으로 돌아갈 꽃잎인데, 조금 붙들어 두었다 돌려보낸다고 무슨 죄가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 여름, 이사하고 짐을 정리할 때 보니 그 벚꽃잎 상자는 사라지고 없었어요. 나는 집을 몇 번 뒤졌지요. 당신을 의심했지만, 증거가 없으니 어쩔 수 없었어요. 


그렇게 그냥 데면데면하는 정도까지 된 채로 세월이 흘렀어요. 밖에 외식이라도 나가면 이제는 남들이 ‘부부사이가 틀림없어. 절대 불륜이 아니야.’ 할 정도로 무표정하게 음식만 먹고 충분히 떨어져 걸었지요. 밖에 나갈 땐 늘 손을 잡고 다녔던 우리였는데요.      


어느 날 셍 텍쥐페리의 어린왕자가 한 말이 떠올랐어요. 누구나 자신이 길들인 존재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아, 나도 장미였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리고 기억해 냈어요. 젊은 시절 당신도 한 송이 장미였고, 그러니 나도 당신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것을요. 화원에 가서 꽃을 보았어요. 활짝 핀 저 꽃을 진정으로 누릴 자격이 있는 이는 누구일까? 나는 아니겠구나, 진딧물도 잡아주고 손에 흙도 묻히며 꽃나무를 위해 수고해 주는 이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만약 우리가 영원히 남남이 되기로 한다면 아쉬움 없이 잘 해준 적이 있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그때까지 내 마음에 곤두서있던 가시들이 누그러진 것 같아요. 더 이상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에만 집중하지 말고, 시어머니 빼고는 세상에서 당신에게 제일 잘해주는 여자는 내가 되어야 한다고요. 설령 나중에 남이 되더라도 내가 당신에게 제일 잘해준 적이 있어야겠다고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당신 몸에 큰 탈이 생겼지요. 나를 두고 영원히 휘릭 떠나버릴 수도 있었다는 걸, 아찔하게 깨달았어요. 그동안 그리 많았던 불만이 일순간에 자취를 감춰버렸고요.      


요즘은 내 마음이 당신이라는 집의 처마 끝 풍경이 된 것 같아요. 이제는 튼튼한 쇠줄에 매달려서 산들바람이 불면 댕그랑, 거센 바람이 불면 땡그랑땡그랑. 바람이 약할 때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지만 처마 끝에서 작은 바람을 느끼며 기분 좋게 흔들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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