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마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헤쳐 나온 20년을 너스레 떨지 않겠다. 하소연하는 글은 탄원서, 일기처럼 독백하는 글이면서, 전혀 독자의 관심을 받지 못 한다다는 점을 깨우친 탓이기도 하다. 진짜 이유는 고생한 흔적보다 헤쳐 나가면서, 주체적으로 길을 만들어간 나 자신이 더 귀하기 때문에 그런 시절의 나를 표현하는 것이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샐러리맨에서 사업을 시작한 결정은 난데없이 이루어졌다. 2002년, 다니던 회사가 M&A를 통해 사라지는 아픔을 겪었다. 과장 이하 직원들은 노조의 힘으로 고용이 승계되었지만, 차장 이상의 직원들은 6개월 임금을 추가로 받는 조건으로 퇴직 처리 되었다.
그때, 나는 만 39세의 나이에 실직했다. 이미 나는 강원도의 최고 책임자인 사업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에 경제 신문에 날 정도로 금융 분야에서 최연소 승진 기록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고용 승계 또는 스카우트를 받는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당시 업계는 IMF의 모진 터널을 나와 경영 플랫폼을 재정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집 한 채 말고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원주에 살던 집도 회사가 지원한 사택이었다. 대출을 혐오했던 나는 대출 외에 영혼까지 끌어모아 원주에 집을 하나 더 구입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는 가장이 되고 싶었다. 이 것 말고 경기도 수지에 전세 놓은 한 채가 있어, 다주택자라 불렸지만,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였다.
나는 새로운 사업에 집어넣을 돈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대출 없는 사업을 하기로, 그래서 망하더라도 가족에게 피해 주지 않고 회사만 청산하면 되도록 창업을 준비했다. 그렇게 자영업자, 법인 대표로, 사업가로 나섰다. 투자금은 50만 원이 전부였다. 50만 원으로 중고집기와 중고 에어컨을 샀다, 사무실은 지인에게 빌렸다. 이렇게 작은 출발점을 나서서 나는 장사꾼이 되어야 했다.
사업은 탄탄대로를 달렸다. 창업 2년 만에 수십 개의 직영점포를 냈고, 서울로 본사를 옮겼다. 급속 성장을 예의 주시한 국세청 감사도 받았다. 창업 5년 만에 연매출 백억을 돌파했고, 직원수도 3백 명을 넘어섰다. 창업 10년, 매출은 2백억, 직원수는 9백 ~1천 명에 달했다. 그야말로 천지개벽이라고 해도 될 만한 아웃풋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