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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기 May 31. 2024

쉰 하나, 고아가 되다

고아가 되었다고 하소연하려는 게 아니다. 유난히 나만, 부모님이 그립다고 우기는 것도 아니다. 인생 선배로 불릴만한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어 본 경험자로서 어떻게 마음을 다스렸는지 수다 떤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부모는 병풍과 비슷한 존재다. 언제나 내 편이고, 무슨 일을 하든지 진심으로 응원해 준다. 그래서 부모 앞에서는 블러핑(bluffing) 즉, 허세를 부려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부모님 보는데서 코를 골아도, 머리가 떡진 꾀죄죄한 몰골을 보여도, 설사 방귀를 뀌어도 부끄럽지 않다. 이렇게 영원한 내 편, 병풍 같은 존재,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누구든지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유독 채송화를 좋아했다. 내 어린 시절 옛집 화단과 마당을 구분 짓는 경계에 벽돌이 늘어서 있었다. 벽돌 하나에 두 개의 구멍이 있고, 벽돌과 벽돌을 이어 붙이면 맞닿는 공간에 작은 구멍 하나가 더 생긴다. 결국, 벽돌 한 장에 두 개의 구멍과 양쪽에 반개의 구멍이 두 개 있는 것이다. 이렇게 벽돌을 이어 붙이면 벽돌마다 세 개의 구멍이 있는 셈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세 구멍에 어김없이 채송화를 심었다.

일제 치하, 국권 피탈 시기에 결혼한 어머니는 신혼 초 일본에 사셨다. 아버지가 오키나와에 있는 탄광회사에서 근무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다시 아오지 탄광에 취업했다. 우리 부모님은 아오지 탄광 마을 낡은 집에서 생활했다. 함경도 매서운 추위가 지나고 봄이 오면, 어머니는 들꽃을 꺾으러 산으로 다니는 것이 소일거리였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다가 6.25 전쟁이 임박했다는 흉흉한 소문에 살던 집을 버리고, 큰형을 둘러업고 고향인 충북 영동으로 남하했다. 북풍한설을 뚫고 개마고원이 위치한 삼수갑산을 걸어 함흥에 이르러서야 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고 한다.

1923년생인 어머니는 10년 전에 돌아가셨다. 세월호 사고가 난 다음 달인 5월 8일, 어버이날이었다. 아흔한 살까지 사셨으니 장수했다고 볼 수 있지만, 어머니는 35년을 과부로 외롭게 살았다.
어머니는 해마다 장터에서 채송화 씨를 사준 아버지가 고마웠다고 말하셨다. 공무원이었던 구식 아버지는 자상하지 않았다. 시간이 나면 숙직실에서 화투를 치고,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대폿집에 들러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켜고 오는 게 다반사였다.

아직도 어머니의 꽃밭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우리 집에는 주철로 된 지하수 펌프가 있었고, 샘터 옆에 살구나무가 있었다. 우리 집 살구는 굵고 질이 좋아서 동네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샘터 오른쪽은 장독대였고, 길게 대문까지 어머니의 꽃밭이 이어져 있었다. 다른 집들은 그런 땅이 있으면 상추나 고추를 심어 텃밭을 만들지만, 어머니는 이 공간을, 꽃을 가꾸는데 투자했다. 부잣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어머니는 농사는 물론 바느질이나 허드렛일을 안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꽃밭을 가꿀 때는 호미와 모종삽을 들었다.

대보름과 추석에 보는 둥근달은 옛 기억을 불러온다. 당시, 우리 가족은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 살구나무 가지에 걸린 달을 바라보았다. 평소에 말이 없던 어머니도 그날만은 무성영화의 변사처럼 일제 치하와 전쟁 시절, 피난 갔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45년이 지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많이 희석되었다. 하지만, 10년 전 돌아가신 어머님은 다르다. 하염없이 그립다. 나도 환갑 나이가 지났지만, 지금도 어머니 앞에서 어리광 부리고 싶다. 돌아가시기 전,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했던 말을 또 한다고, 윽박지르고 짜증 낸 기억이 죄스럽게 남아있다.
임종을 앞두고 피골이 상접했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머니는 35년을 과부로 사셨다. 큰형이 모신 적도 있고, 내가 학생일 때 어머님과 단둘이 살기도 했지만 거의 삼십 년을 홀로 사셨다. 엘리베이터 없는 5층 아파트의 4층 계단을 힘겹게 오르내리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채송화 씨를 심느라 호미를 쥐고 흙을 만지던 손과 쭈글쭈글 노쇠했던 어머니의 두 손이 생각난다. 채송화처럼 다채로운 색을 가졌던 어머니. 일제 치하, 피난과 전쟁을 겪은 질곡의 시대의 어머니. 평생을 고단하게 살았지만, 말없이 혼자 추억을 삼킨 어머니. 35년 만에 저승에서 아버지를 만나면 폭삭 늙어 쭈글쭈글해진 어머니를 아버지가 못 알아볼 텐데 어쩌느냐고 약을 올리면 ‘내가 네 아버지를 찾으면 된다.’라고 우문현답하셨던 어머니. 이제는 꿈에서조차 잘 만나지 못하는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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