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은 진부하다. 요즘에는 아이들조차 위인전이나 자서전을 보지 않는다. 서로 다양성을 인정하고, 타인의 취향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성적이고 수준 높은 사회 가치가 되었다. 어른, 아이 막론하고 단톡방이나 SNS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게 대세가 되었다. 자기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과 정보를 나누는 커뮤니티에 가입하고 참여한다. 취향만 같으면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또래인 줄 알았더니, 상대가 초등학생이거나 할머니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부모 손을 잡고 자장면 그리고 돈가스를 먹으러 다니는 나이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 좋아하는 마라탕, 탕후루를 먹겠다고 용돈을 받아 끼리끼리 모인다. 부모가 강압적으로 자장면을 먹이면 일단은 따르겠지만, 머릿속은 온통 친구들과 마라탕을 먹을 기회를 엿보고 있을 것이다.
다채로운 세상, 다양성이 존중받는 세상에서 자서전은 이미 식상한 메뉴이다. 남의 인생에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 「브런치북」은 자서전이 아니다. 하소연하는 문장이 전혀 없을 수는 없지만, 가급적 인생 경험에서 우러난 교훈을 담을 것이다. 독자에게 꿀팁이 되는 내용을 담을 것이다.
‘감정을 빼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라’는 말이 있다. 싸우지 않고 잘 지내라는 의미라지만,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성인(聖人)이 아닌 이상 모든 사람은 감정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사람은 감정 없는 로봇이 아니다.
나는 작은 몸짓으로 소원한다. 감정을 느끼지만,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지 않는다. 술에 취하지 않으면 남 앞에 잘 나서지 않고 목소리가 큰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소극적인 사람도 아니다. 조울증처럼 기분이 오락가락하지 않지만, 기쁠 때도 조용히, 슬퍼도 혼자 감정을 삭이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남편, 아버지로 살았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 입장도 있었지만, 내게만 주어진 입장도 있었다. 늘 옳은 선택을 하지 못했지만, 순간순간에 그래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기준으로 선택했다.
예순, 은퇴했다. 나는 또 선택의 기로에 섰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 생각했다. 여러 꿈을 포기했다. 나이에 맞게 순응하는 삶이 아닌, 평범한 삶이 아닌, 돈을 벌려고 덤비는 삶이 아닌 멋있는 삶을 선택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작가가 되겠다는 꿈이었다. 작가가 되겠다는 마음을 먹는 순간, 작가라는 직업은 이미 나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나의 일부가 된 이상, 작가가 아닌 나를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출간 작가가 되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 문인이 되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다. 자기 계발서를 쓰는 작가가 아닌 순문학을 하는 작가가 되기로 다시 결심했다. 사유하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좁아터진 방 안, 책상 앞에 앉았다. 창작이라는 과제를 받은 습작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