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을 내보이는 부끄러움을 배우고 있다. 그러면서 점점 낯이 두꺼워지고 있기도 하다. 이태 전, 소설을 습작하면서 처음으로 합평을 받았다. 같이 배우는 10여 명의 문우들에게 45일마다 한 번씩. 완성작이든, 미완성이든, A4 세 페이지 또는 열 페이지를 꺼내놓고 비평을 듣는 일은 꽤나 거북한 일이었다.
꼰대로 불리는 나이다. 남에게 험담을 듣거나, 지적받을 일을 자제할 수 있는 나이다. 하지만, 글을 쓴 경력으로 보면 새내기이자 어린 아이다. 그러니 선배들에게 질타를 받으며 배우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도 불쾌함을 느끼는 이율배반의 본성이 나의 내면에 뿌리내리고 있다.
'고집멸도'라는 불교용어가 있다. 가르침대로 집착과 고집을 버려야 하지만 쉽지 않다. 누가 내 글을 비판하면 화가 난다. 문장을 지적하면 지적하는 사람의 글 수준을 복기해 보며 냉소적으로 반응하거나 자존심이 상하기 일쑤인 것이다.
그런데도 합평글을 내보이려고 문우들을 찾고, 대학원 원우들에게 원고를 보낸다. 보다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전체 소설가의 2% 안에 들어가는 작가가 되고 싶다. 그 정도는 되어야 다른 직업 없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나는 생계 때문에 글을 쓰지는 않는다. 아니, 역설적으로 말하면 생계에 전혀 걱정이 없어서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2% 안에 들어가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명예를 추구하고, 남으로부터의 인정을 갈구하기에. 속물인 나도 마찬가지기에.
대학원에서 詩창작을 배우고 있다. 창작시를 업로드하고 다른 원우들에게 합평을 받는다. 고등학생 때, 끄적이던 게 전부인 나로서는 40년 만에 시를 쓰는 것이다. 당연히 조악한 묘사, 알레고리와 상징 기법을 녹여내는 게 서툴다. 그래서 합평 시간이 다가오면 두려움을 느낀다.
수업의 일환으로 詩를 배우지만, 수준이 오르면 詩集을 내려고 한다. 그러려면 詩로도 문학상을 타거나, 신춘문예에 당선되거나, 지자체 공모전에 당선되어야 한다. 문학의 길은 실로 험난하고 어렵다. 詩로 당선된다는 것을 확률로 보면 보통 수천 대 1, 수만 대 1 이기에...
어쨌든, 도전하는 일은 흥미롭다. 신나게 글을 쓰는 시간에 느끼는 감정이 행복이 아닐까? 나는 행복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불행의 반대가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즉, 불행하지만 않다면 행복한 것이다.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일상을 사는 밋밋한 순간도 행복의 범주에 들어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