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수현 Oct 31. 2024

출근길 단상

동네

갈라진 도로의 포석 틈새로 가난이 보인다. 사는 사람들의 수준은 공공시설물에 지자체가 투자하는 정도에 반영되어 낡은 동네는 모든 것들이 함께 늙는다. 하지만 나는 부유한 동네만큼 손을 자주 타지 않은 이런 동네들을 좋아한다. 어느새 도로의 포석조차 자연의 일부처럼 늙어가지 않는가. 때때로 그 틈에서 민들레가 자라곤 한다. 민들레가 어디서나 잘 자란다는 것은 포석이 금이 가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사실이다.


가로수처럼 오래된 가게들도 촌스런 구식 간판과 인테리어로 연식을 가늠할 수 있다. 그것은 동네 사람들과 함께 성장해온터라 누군가의 유년기를 맡고 있는 소중한 동네 유산이다. 특히 초등학교 때부터 먹던 떡볶이 집처럼 절대 사라지지 말아야 할 가게들은 이 곳 자연의 일부라 여기고 싶다. 사랑받아 온 동네다.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들과 이곳밖에는 머물 곳이 없는 사람들은

먹고 살 집이 있고, 가족과 함께 있을 수 있어서 이 동네에 감사하고 있다.


재개발 지역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주민의 90%가 떠난 동네에서 살았다. 남기로 한 이들을 붙잡은 것은 보상금이 아니라 동네 자체였다. 평생 살아 온 곳을 떠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동네로는 도저히 갈 수가 없어서 공사가 진행될 때까지 끝끝내 버틴 그들은 한 가족처럼 살았다. 언젠가 서로를 두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서러워하는 토박이들이었다. 그 속에 낀 이방인이었던 나는 이사 첫 날 삼겹살을 대접받았고, 동네 엄마와 아이들이 내 아일 돌봐주었으며, 나는 어른이 되고 처음으로 친구가 생겨서 함께 육아의 스트레스를 견디고, 우정도 나누었다. 정이 많은 그들은 좋은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같은 지역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아꼈다.


자유란 무엇일까. 어느날 다 무너져가는 빈 집 사이를 산책하다가 한 할아버지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분은 자신의 집 옥상에서 어딘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는데 나는 그 모습에서 이곳에서 이렇게 머물다가 생을 마치고픈 열망을 읽어낸 것만 같았다. 남은 생이 이 동네보다 길지 않기를 바라는 듯한 그분의 체념한 얼굴에서 깊은 슬픔과 피로가 배어나왔다. 동네 친구 엄마의 말에 의하면 그분도 이 동네 토박이라고 했다. 그분은 투사였다. 끝끝내 자신의 추억과 역사와 이웃을 사수하고, 자신이 살 곳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그분의 투지는 왠만한 아나키스트 못지 않았다. 나는 그분이 패배할 순 있어도 포기할 순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게 자유가 아닐까. 나답게 살 자유.


우리들은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성공을 원하는데 왜 소수만 성공을 하고, 대다수는 시지프스와 같은 피로에 절어 불행한 걸까. 나는 가난한 사람들 틈에서 살아 왔지만 수 많은 행복의 전형들을 안다. 이들은 쾌락주의자다. 그리고 현실주의자다. 에피쿠로스를 읽어본 적은 없지만 에피쿠로스처럼 자족하며 살아가는 쾌락주의자다. 그리고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는 삶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아는 현실주의자다. 몽상가들은 성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화려한 법칙을 나는 잘 모른다. 나는 몽상가로 태어나지 않았고, 내 삶의 범위 안에서 자족하며 에피쿠로스를 스승님으로 모시고 있는 쾌락주의자일 뿐이다. 민들레가 피는 포석을 사랑한다.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 보는 하늘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가늠하기엔 지금 저 비현실적인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서 눈이 멀었다.

작가의 이전글 출근길 단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