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시간이 되자마자 가방을 싸서 달렸다. **대학 행정실에 도착하니 6시 30분도 되지 않았다.
"아이고 우찌 그리 딱 맞추었노? 직원들이 안 가서 마음이 조마조마했는데 지금 막 다 갔다"
친언니보다 더 다정하게 맞아줬다. 오늘은 둘이서 영어 독해 하는 날이다. 조오지 오웰의 '동물농장'(animal farm) 원서를 읽고 있었다. 두 바닥씩 번갈아 읽어나갔다. 미리 단어를 찾아가면 진도가 더 잘 나갔다. 한 권을 떼고 가세를 몰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였다는 조엘 오스틴의 'Your Best Life Now'를 선택했는데 쉽기도 했고 의외로 재미있었다. 기독교 신자이기도 하고 영문학을 전공한 선배는 진솔하게 풀어주기도 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건 대학에 전입한 후 영어회화 동호회에서였다. 처음 강의실에 갔을 때 편안한 원피스를 입은 분이 먼저 와 있었는데 교재를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까만 안경을 쓰고 고개를 드는데 그 첫인상이 참 편했다.주중 1회, 점심시간에 모여서 외국인 강사에게 받는 수업이었다. 월회비를 내고 자발적으로 모였지만 부서 점심팀에서 빠지고 참석하는 일은 그 당시 쉽지 않았다.
그렇게 같이 영어공부도 하고 학내 독서모임도 함께했다. 그런모임들이 여의치 않게 되자 '이지성의 폴레폴레' 진주 온라인 카페를 만들어서 나를 불렀었다. 그 선배가 은퇴하기 한참 전에 우린 또 일주일에 두 번 마주 앉아 그렇게 영어책을 읽은 것이다.
저녁 식사로 김밥과 우동을 주문해 놓았다.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았던지 밥을 먹으면서도 대화는 끊이지 않았고 책을 읽어 나갈 때는 간혹 저녁 10시를 넘기기도 했다. 일주일 중 하루는 퇴근 이후에 만나고, 하루는 주말에 만났다. 주말에는 가장 허비하기 쉬운 시간대를 골랐는데 일요일 오후였다. 아이들과 가사를 어느 정도 정리해 둔 시간이고 주로 낮잠으로 낭비하기 쉬운 시간이라 정했다. 혼자면 못 봤을 영어책을 둘이 서 읽으니 진도가 잘 나갔다.
"아요 우리 큰 아가 도대체 니가 이해가 안 간단다."
"뭐가요?'
"영어공부를 한다고 월급이 더 나오는 것도 아니고 보너스를 받는 것도 아닌데 엄마는 애도 다 키웠고 영어를 전공했다지만 ***샘은 아이들도 어린데 어찌 그리 하노?라고 하더라."
그 말에 우린 마주 보고 한참 웃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해본 사람은 안다. 얼마나 재미나는지. 그러나 그런 자리는 곧 접어야 했다.
어느 날,
"아요 **야! 우리 공부 계속 못할 거 같다" "'왜요?"
"아이고 있잖아! 세상에! 참 말로! 글쎄 우리 신랑이 의심을 한다." "네?"
"일요일 오후에 도대체 어디를 가냐고 하더라"
우린 마주 보고 이번에는 배를 잡고 웃었다.
"그라모 그만 하입시다" 그렇게 둘이 하던 독해는 막을 내렸다.
꽤 오래전 이야기다. 아직도 책장에 꽂혀있는 그 책을 펼쳐보니 눈에도 잘 들어오지 않는 작은 글자들이 빼곡하다. 10여 년이 훌쩍 넘었다. 좀 더 젊던 날의 열정이 묻어있었다. 어딘가에 자신감과 에너지로 남았을 그 추억들이 새록새록 묻어나는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