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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조와 덕이 Dec 29. 2023

진짜공부는 스스로 해야 하는 걸까


'아카데미 남명' 수업이 있는 날 여유 있게 나섰다. 6시 전후인데도 어둠이 짙지 않았다. 동지 지나고 그사이 낮이 길어지는 듯싶었다. 오늘의 주제는 '경남지역 남명 연원가와 그들의 역할'이었다. 궁금했다.


강사님은 비행기 연착으로 좀 늦으셨고 수업을 주관하시는 '김영기 교수님'은 허리수술 후 복대를 하시고 기어이 오셨다. '심부름 책임자'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시작으로 정시에 마이크를 잡으시고 강의 전에 귀한 말씀을 주셨다. 매번 수업마다 참기름 같은 역할을 해주신다. 강사님이 오시기까지 작은 강의가 있었고 말씀하시는 책 제목은 얼른 받아 적었다.


수업은 교재와 다르게 대부분 남명 선생님 이야기와 남명 말씀을 모아 설명하고 풀어주셨다. 강사님은 왼손에 잡은 마이크를 아래로 향하게 들고 계시다가 어느새 바닥에 놓으셨는데 200여 석이 넘는 강의실에 5~60명의 수강자가 있었지만 육성으로 진행하여도 어느 누구 말씀이 없었다. 모두 귀를 세우고 듣는 모습이었고 수업에 대한 믿음과 존중이 느껴졌다. 강사님의 진행에 방해가 될까 하여 말씀하지 않는 듯했고 그 정도로 수업에 진심인 분들이 모여있었다.   




두 갈래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하셨는데 첫 번째는 '남명은 독설가다'였고 두 번째는 '남명 100년 후~~'라는 부제가 있었다. '독설가'의 뜻은 '남을 사납게 비방하거나 매도하여 해치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 되어있었다. 소개해주신 남명의 말씀은 남을 사납게 비방하거나 해치는 말은 아니었고 다만 저런 말씀도 하셨었구나 싶었다. '남명은 멋있으나 더불어 벗하기는 싫다'라고 한 누군가의 글을 소개하셨는데 나는 그 밑에 '너무 반듯하여 불편하였을까'라고 적어보았다. 강사님은 '두려워서 기호에 안 맞아서 독특한 캐릭터라서 등등의' 표현을 하셨고 그 말은 좀 싫었다.


남명의 말씀을 소개하며 정말 스케일이 다른 분이었다고 했지만 남명이 목숨을 걸고 '을묘사직소'를 올린 내용은 너무 간략하게 설명했다. 대왕대비인 문정왕후를 '구중궁궐 속의 과부'라고 했고 어린 임금을 '선왕을 잃은 고아'라고 했으며 척족 세력을 향해서 '야비한 승냥이 무리'라고 한 직언은 상소의 표본으로 조선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일이다.


조선전기는 여성의 재혼이 흔했고 조선후기에 주자학의 영향으로 여비 사상이 나타났는데 그게 조선 전체 문화로 인식되어 오늘에 이르러 아쉽다고 하셨고, 하지만 이제 대한민국은 남녀 똑같이 상속을 받고 있다 하셨다. '법은 그렇게 변했는지 몰라도 지금 우리 사회는 여전히 그 조선후기 시절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산율이 바닥인 한 이유는 강사님이 말씀하시는 그 조선 후기부터 자리한 여성 천시의 관념이 한몫했다고 본다. 불과 얼마 전에 나온 책 '82년생 김지영'이 그런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화류관(여색)을 설명하면서 쇳덩어리도 돌덩어리도 다 녹이는 여색은 제자들이나 남명 본인이 같이 극복해야 한다는 뜻으로 나눈 말이라 하셨다. 세상에는 여성과 남성이 있는데 강사님의 표현은 여성을 가벼운 존재나 물질로 대하는 느낌을 줬고 청자들을 난처하게 했다.


가난한 양반이 부유한 집안의 딸을 소실로 들이기도 했다고 남명 선생님의 손녀사위가 소실을 들이기 위해 남명 선생님에게 허락을 구하는 일화를 소개하셨는데, '(그런 일은 알아서 하지 물어보다니) 어찌 나를 박대하는 것이냐'라고 화답하여 묻는 자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줬다고, 그러니 남명선생님의 인품은 상대를 편하게 해주는 좋은 분이었다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시간을 할애하여 말씀하셨다.  



남아있는 남명선생님의 (덕천) 서원 사진을 보여주며 퇴계 도산서원의 규모는 더 컸노라 하셨는데 왜 그런 차이가 나는지 설명은 없었다. 퇴계 선생님은 안동고를 나와 서울대를 갔고, 남명 선생님은 경기고를 나와 경상대를 간 형국이라 하셨는데 그런 비유를 했으면 그렇게 진로를 택한 시대적 상황과 이유 그리고 그 각도에서 각각 어떤 일을 했는지 추적하여 설명해 주셨어야 했다. 사화로 집안이 풍비박산되는 상황에서 시대의 문제를 읽고 서울대를 안 가도 할 일이 있다고 결심하였기에 본인의 입신을 접고 내려온 남명 선생님의 이야기는 없었다. 비유가 적절하지 않았고 남명 선생님을 오해한 듯싶었다.


임진왜란이 났을 때 남명의 제자 57명이 사재를 털어 의병운동을 했는데 퇴계 선생님은 어떤 일을 하셨는지 질의를 했다. 난국에 대처하고 역할을 한 데는 분명 남명 선생님이 더 큰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이라고 하셨다.


남명은 말과 주장이 보통 사람을 넘어 타고난 학문이 매우 드높고 탁월하다(장현광의 말)라고 소개하시는데 강의를 들을수록 논지가 궁금해지고 의문은 더 커졌다.


무언가가 궁금하다면 진짜 공부는 결국 혼자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일까. 강의 주제에 궁금증을 안고 갔는데 전체 내용을 종합해 보아도 뭔가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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