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키워보면 얼마나 귀여운 동물인지 새삼 알 수 있다. 그 코 끝의 연분홍 세모가 얼마나 이쁜지, 제 몸을 얼마나 깔끔히 간수하는지, 얼마나 똑똑한지, 호기심은 또 얼마나 많은지. 그럼에도 그렇게 얌전할 수가 없다.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는 책을 볼 때만 해도 고양이를 키울 기회가 오리라고 생각 못했다. 생후 2주짜리 눈도 못 뜬 녀석이 우리 집에 왔다가 8개월여를 살다 갔다.
아이를 택할지 고양이를 택할지 선택해야 한다던 이비인후과 의사의 말에 보내야 했다. 더 이상 작은 아이를 눈 퉁퉁이로 둘 수 없었다. 아토피까지 오는 상황에 알레르기 수치가 100이 넘었었다. 보내줘야 했다. 찾아온 젊은 부부가 우리 고양이 '마리'를 입양해 갈 때 예쁜 집이랑 사료랑 놀이기구들을 양손에 바리바리 들려서 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간혹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파양 한 사람이 연락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아이의 대견함이 놀라웠다.
몇 해 전 엄청 자란 녀석의 사진을 보았고, 이제는 더 바랄 수도 없다. 우리 집을 거쳐간 고양이 '마리'는 부르면 달려와 분홍색 코를 들고 내 앞에서 고개를 들었다. 검지로 '토토톡' 코를 두드리며 이뻐했던 마리 이야기가 길었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른 것이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말이 생각났고, 나는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고 싶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생각해 보니 그 고양이는 따뜻한 곳을 좋아하는 동물이었다. 이불을 깔아 두면 살금살금 그 아래에 들어가고 살포시 들여다보면 눈을 마주쳐줬다. 누군가는 새벽녘이면 발끝을 살살 건드리며 눈치를 보다가 주인이 가만있으면 살금살금 배 위로 올라와 잔다고 했다. 그러니 고양이는 따뜻한 곳을 좋아하고 언제든 따뜻한 부뚜막에 올라가려고 하는 특성을 가진 동물임에 틀림없다.
따뜻한 부뚜막에 올라가고 싶었으면서도 고양이가 되지 못하고 늘 강아지였지 않았나 싶다. 살랑살랑 꼬리만 치고 눈치 보며 괜찮다 말하던, 그러면서 뒤로는 아쉬워하면서 말이다. 부모님 앞에서도 괜찮다고 했고, 직장에서도 괜찮다고 마음 넓은 척했다. 가정을 꾸리고서도 가장 꼴찌에 나를 세웠다.
아쉽거나 크게 억울하지는 않다. 그저 간혹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 고양이가 되고 싶어진 것이다. 욕도 좀 먹어보고, 남들의 기대와 예상을 벗어나고 싶다. 쉬 대해도 되는 사람이고 싶지 않다. 상상도 하지 못한 파격의 모습을 고양이처럼 숨겨놓고 싶다.
얌전해서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숭 떨다가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부뚜막은 어떤 고양이나 다 올라가고 싶은 따뜻한 곳이지 않나. 애초에 그 비유는 잘 못됐다.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 맞았을 때, 물 취급을 했던 사람이 세게 나올 때 흔희들 비아냥 거리면서 그런 말을 하지만 고양이는 그리 쉬운 동물이 아니다. 이제는 그런 비유 말고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제대로 올라갔네'라고 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