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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꽃 Apr 12. 2024

닭울음 소리에 깨어 의관을 갖추신 분

'남명의 인간관계' - 윤호진 저 -


윤호진 님이 책 서두에 말씀하시는 남명 조식 선생님은


자신에게 엄격했던 학자로 평생 남다를 지절을 가지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무진 애를 썼으며, 끝내 그것을 지켜내었다.


닭울음을 듣고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갖추고 띠를 매고 똑바로 앉아 어깨와 등을 곧게 하여 앉았으니, 바라보면 그림이나 조각상 같았다.


홀로 서실에 계실 때에는 책이나 물건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깨끗하게 하여 안정감 있게 일정한 곳에 두었으며, 종일 단정히 앉아 비스듬히 기대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선생의 조행은 과단성 있고 움직일 때는 규칙을 따르고 눈으로 사특한 것을 보지 않고 남의 귓속말을 듣지 않았다. 엄숙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항상 간직하고 게으른 모습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1501년에 태어나 1572년 선조 6년에 돌아가신 남명 조식 선생님은 6세에서 26세까지 한양에서 사셨고 이후 실천하는 학문을 하고자 낙향하셨다. 경상우도 김해 산해정과 합천 삼가 뇌룡정 그리고 산청 덕산의 산천재에서 여생을 보내신 남명 조식 선생님은 경상좌도 안동의 퇴계선생님과 같은 해에 태어나 70 평생을 영남에 함께 사신 유학자다.


남명 선생님은 책으로만 외우는 학문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직접 실천하는 유학을 몸소 보여주셨고 그 결과는 임진왜란 때 일어선 의병장으로도 알 수 있다. 사재를 털어 의병장으로 나선 정인홍 곽재우 등 57명이 남명 선생님의 제자들이다.


윤호진 님의 책  '남명의 인간관계'는 5가지 범주로 나누어서 주변인들과의 생활 모습을 소개한다. 실천유학자 남명 선생님의 가족, 벗, 임금, 제자, 당대 학자들과의 관계에서 발췌한 부분이다.



남명의 가족과의 관계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에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리고 따뜻한 옷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였다. 상중에 있을 때에는 피눈물을 흘리고 질대를 풀지 않았으며 제사 때에는 음식을 조리하고 식기를 깨끗이 씻는 것 등을 주방의 노비에게만 맡기지 않고 몸소 하였다.


벗과의 관계

외양보다는 마음과 행동을 보고 마음이 바른 사람을 벗으로 하였다. 뜻을 벗하고 도를 벗하는 사람이 진정한 벗이다. 신의라는 것은 벗 사이에만 있어야 할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 필수적인 것이다.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에도 부부간에도 있으며 부모 자식 간에도 신뢰가 없으면 패륜이 발생한다.


임금 및 권귀와의 관계

을묘사직소, 단성현감사직소에 대하여 언관들은 조식을 옹호하고 임금의 태도와 처신을 비판했다. 남명 자신은 임금에게 혹독한 진언을 하면서 앞날이 창창한 후배들은 그런 상소를 못 올리게 말렸다. 임금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은 것은 불공도 아니고 비판도 아니었다. 임금을 사랑하고 백성을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이다. 남명의 이런 마음을 사신들만이 알아주었다.


제자와의 관계

제자 각인의 특성에 따라 다른 교육과 평가를 하여 맞춤형 교육을 했다. 공자의 교육방식에 연원을 둔다. 공자도 상대적 인식을 바탕으로 제자의 자질이나 성격, 당시의 상황 등에 따라 적절한 처방식 교육을 하였는데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라 하겠다.


머릿속으로만 학문을 해서는 안 됨을 강조하며 실질적인 공부를 해야 함을 비유적으로 했다. 남들이 정리해 놓은 글을 백날 읽어봐야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탁상공론보다는 실천궁행이 중요함을 가르쳤다. 비유를 통하여 자세하고 기품 있게 이야기했다.


'내 집에 소 한 마리가 있는데 군이 끌고 가게'  ---> '군의 말과 얼굴빛이 너무 민첩하고 날카로우니 날랜 말은 넘어지기 쉬운지라 더디고 둔한 것을 참작해야 비로소 멀리 갈 수 있으므로 내가 소를 준다는 것이다'


제자가 스스로 깨우치게 했다. 학문을 하는 것은 처음에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공경하며, 어른께 공손하고, 어린이를 예뻐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당대 학자들과의 관계

남명과 퇴계는 70 평생을 영남에 있으면서 직접 만나보지 못했다. 영남 좌우도를 대표하는 학자다. 퇴계가 남명에 대해 상당히 적극적으로 비판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남명은 학자로서의 퇴계를 높이 평가하였고 큰 기백을 가진 것으로 평가하였다.




책의 맺음말이다.


남명은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다. 우애 있었고 재산을 아우들에게 우선적으로 주었으며 처자들에게 따뜻하였다. 임금과 권귀와는 가까이하지 않았고 제자들을 경의로 가르쳤다. 선현의 가르침을 실천적으로 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퇴계와는 서로 존경하고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후대 사람들이 부풀려 남명과 퇴계 사이에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선현들의 가르침을 실천적으로 적용하여 상대의 잘못을 바로잡는 일을 서슴지 않아 원망을 사기도 했다. 아무리 친하고 존귀한 사람이라 해도 잘못된 점이 있으면 지적하였는데 이것이 실천을 중시하였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대학의 남명학연구소에서 2005년도에 출간한 책이다. 책을 구해 늦은 밤에 갖다 준 동생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5백 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남명 선생님의 생활태도와 자세, 인품은 한 글자 한 글자 새기며 배워야 할 부분이라 옮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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