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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조와 덕이 Apr 27. 2024

삼신할미의 기원을 찾았다

'이이화의 못 다한 한국사 이야기'


새순이 푸릇푸릇해지고 잎이 무성해지면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온다. 어린이날 어버이날이 있는 그 가정의 달에 '부처님 오신 날'도 있다. 그날이면 안 가던 사찰에도 가곤했다. 딱히 종교가 있음도 아닌데 대웅전에 들러 절도하고 삼신당도 들여다 보았다. 그럼에도 몰랐는데 그 삼신당의 삼신할머니의 유래를 이제야 알게 됐다.


삼신에 대하여 daum 사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삼신할머니, 삼신바가지, 산신이라고도 하며 옛날에는 태를 보호하는 신을 삼신이라 했다고. 아기를 낳다가 죽는 일이 많았고 커서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도 삼신의 배려가 절대적이었기에 당시에 의학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점들을 어머니의 비손에 의지했다고.



이이화 선생님이 쓴 '이이화의 못 다한 한국사 이야기'에서 삼신의 유래를 수 있었다. 삼신은 단군의 아들이었다. 단군의 아들인 환인 환웅 환검이 우리나라의 삼신이 되었단다. 이 삼신을 삼성이라고도 부른단다.


'삼신은 천지를 창조하고 온갖 물건을 만들었기에 민간 풍속에서 어린아이를 낳으면 삼신할미에게 목숨을 빌기도 하고 또 집집마다 거처하는 방벽에 쌀을 넣은 종이 주머니를 달아 매 놓고 삼신낭이라 부르며, 10월 새 곡식이 나오면 떡을 쪄서 여기에 큰 복을 빌었다.'


'이이화의 못 다한 한국사 이야기'에 '단군숭배는 민족 의례다'라는 글이 있었다. 단군과 그 아들 삼신의 설명과 함께 단군숭배가 왜 민족 의례로 남아야 하는지의 내용이다. 단군을 받드는 일은 우상숭배가 아니라 민족 의례에 속한다고, 민족의 주체적 표현이나 통합의지의 구심체로 이해해야 한다고 하신다.




단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에 있고 신화 부분을 제외하면 3가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단다. 요임금 때 기원전 2355년에 단군이 즉위했고,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조선으로 했다는 것, 다스린 연대가 1천5백 년이라는 것이다. 이 기록에 <고기>를 그대로 인용했는데 고조선시대, 삼국시대, 고려시대를 통해 단군이 우리의 국조로 받아들여졌음을 알 수 있다 한다.


중국의 <위서>에도 단군이야기가 나오는데 근세조선에 <단군고기>를 인용한 글이 <세종실록> 지리지에 있으며 동방의 여러 나라를 통일하여 다스렸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세종실록>에 실려 있는 '단군고기'의 설화를 보면 고구려가 단군조선의 계통임을 밝히고 있다 한다.


조선 후기에 씌어진 <규원사화>에서는 고려 때 이병이 쓴 <진역유기>를 참고해서 단군을 도가의 원조로 단정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환웅 천왕이 백두산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와 나라를 열었는데 이분이 신시씨로 동방 인류의 조상이다. 이분이 백두산 천지에서 하늘로 올라가자 그 아들 환검이 군장이 되었다.'


이 환검의 '검'은 군장, 곧 임금이라는 뜻으로 왕검, 임검이었다가 단군으로 불렸는데, 단군은 '박달임금'의 뜻을 한자로 쓴 것이라 한다. 단군 아들 환인 환웅 환검이 우리나라의 삼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서경>의 내용을 인용하면 중국 요동의 발해만 일대와 황화, 회수 일대에 동이족들이 들어가 땅을 차지하고 살자, 요와 순과 우임금 등이 청주, 기주, 양주 땅을 주어 무마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 후예들이 고구려와 발해와 신라를 건국했고 뒷날 고조선 땅에서 요 금 청 등이 일어났으며 이 나라들이 모두 단군을 받들어 발해는 보본단, 고구려는 성제사, 요는 삼신묘, 금은 개천묘를 두었다고 한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쓰면서 삼국 이전의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다. 150년쯤 뒤에 살았던 이승휴는 <제왕운기>를 적으면서 단군을 국조로 기록하였다고 한다.


고려 후기에 국가제도로 단군을 받들면서 북방으로 고구려의 영토회복하려는 지도이념으로 삼았다.


사대주의에 맞선 주체적 도가 사학자들은 동양 민족이 환웅의 한 자손임을 내세우고 단군이 그 정통을 계승하였으며 한때 중국의 일부 지역도 통치하였다고 주장했다. 고구려가 계승하여 중국과 맞서 영토를 넓혔으며, 단군의 후예인 발해 요 금과 청나라를 한민족 여진족 말갈족 등이 번갈아 세워 중국의 영토를 차지했거나 맞서 싸웠다는 점을 내세워 중국 중심권에서 민족정신을 함양하기도 했다 한다. 그리하여 민간에서는 단군의 사적을 찬탄하는 <세년가>를 부르기도 했다 한다.


단군신앙은 여러 방면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아 19세기 끝 무렵 단군사상은 일제 침략에 맞서는 민족사상으로 정립되었다. 대종교가 창시되어 단군사상을 민족이념이나 자주사상 쪽으로 발전시켰다 한다. 대종교는 단군이 건국한 만주로 본부를 옮겨 본격적으로 항일투쟁에 나섰으며 이들은 상해로 진출하여 임시정부의 터전을 다졌고 청산리전투 등 무력을 통한 항일전을 폈다. 또한 박은식 신채호 신규식 같은 사학자들에 의해 민족자주 사상으로 이론화되었다 한다.


신화는 원시인의 의식 또는 한 민족의 생성을 표상하는 것으로 전설과는 달리 그 나름의 풀이가 가해지는 것으로 끝나야 한다고 했다.


단군을 받는 일우상숭배가 아니라 민족 의례에 속한다고 보아야 하기에 단군을 국조로 받드는 것은 오히려 장려해야 한다고 하신다. 종교적 개념이 아니고 귀의의 대상이 되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민족의 주체적 표현이나 통합의지의 구심체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중국 대륙에서 단군이 건국하였다고 큰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하신다. 세계사를 보더라도 민족은 언제나 이동했고 그 민족이 거쳐 온 지역에 흔적을 남겼다고 하여 영유권을 주장할 근거가 되는 것도 아니란다. 중요한 것은 그 줄기를 찾으면서 과거의 역사를 더듬어 미래의 역사상을 제시하는 데 있다 했다. 그렇기에 단군을 정사로 보기보다 우리의 국조로 받들고 모시는 것으로 만족하자고 글을 마무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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