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은 또다시 피는데!
쓰고 싶어 죽겠는 심정은 말이 하고 싶어 죽겠는 마음과 같다.
잠시 앉아 시간을 좀 내면 어떤 마음이라도 적어보는데 어쩌다가 또 하루를 홀딱 보내면 아쉽다. 이 마음 저 마음 담아서 책도 담고 펜도 담아서 퇴근하는 길에는 그 하고 싶은 말들이 부풀어 올라 더 무겁다. 그 길에 나서서 지우를 만나고 싶은데 헤어 보면 갈 곳도 없다. 그래서 웃으면서 집으로 간다.
직장과 집을 오가던 더 젊었던 날에는 나름 막중한 일이 있었다.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거두어 올 때도 있었고 제 각각 등하교를 하던 무렵에는 얼른 가서 애들을 챙기고 싶었다. 뭐라도 만들어 먹이려고 종종걸음 했다. 이제는 다 자라 떠나고 남은 녀석은 바깥 밥을 더 좋아하는 눈치다.
여유로워졌는데 내 시간을 제대로 못쓰고 있다. 흐르는 시간은 시속 5~60킬로미터 이상인 게 분명하다. 계절마다 피는 꽃들에 환호하며 들여다보곤 했는데 이제 전체 계절이 눈에 들어오는 시절이 되었다. 그래서인가 그 꽃이 다시 피면 반가움만큼 아쉬움도 같이 든다.
어른이 되는 기준으로 사람들은 저만의 독선과 고집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고정관념일 수 있다. 저도 모르게 가지게 되는 그것들로부터 놓여나는 방법을 어떻게 터득하느냐에 따라 어른의 색깔이 다양해지겠다. 그 모두 자기만의 주장이나 생각이겠지만 어떠한 상황에도 깨지지 않는 게 문제다.
모순일 수 있고 착오일 수 있음을 자각하는 게 참 어려운가 보다. 돌려서 생각하는 사고의 유연성이라는 말도 들어 보았고 또 알 텐데 자기한테는 적용을 안 한다. 돌아볼 줄 몰라서 그러는 걸까. 그 인정이 어려워서일까. 의외로 많은 어른들이 제가 들고 있는 것만 쳐다보고 산다. 편견과 선입견이 많다.
세상이 변하는 만큼, 계절이 지나가는 만큼이라도 바뀌어야 한다는 그런 마음 없을까. 그 속도에 맞추진 못할지라도 최소한 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해서 자기 생각을 좀 바꾸어야 하지 않나. 남의 말을 식상하게 받아들이고 눈앞의 즐거움과 제 편의만 쫓는 이들이 많이 보여서 봄날에 마음이 더 무겁다.
알고 가는 길과 모르고 가는 길이 있다. 알려고 하는 관심조차 없는 이들에게 괜스레 마음 줘서 아까운 이 봄날을 허비할 필요는 없겠지. 내 모르는 부분에 그들이 헌신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 수국은 또다시 피고 계절은 또다시 흐르는데 제각각의 일에서 한 발씩만이라도 공익을 앞세우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