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친구가 있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부터 한 동네에 살았으니 죽마고우다. 고교부터는 다른 학교를 다녔음에도 지금까지 절친이다. 어떤 말을 해도 귀담아 들어주고 무조건 편이 되어 준다. 실수를 하소연해도 이해부터 하고 그 이유를 자기가 설명한다. 우리 아이가 그림을 잘 그린다고 했을 때는 '너 닮아서 그렇다'했고 내가 뭘 못한다고 자책하면 잘하고 있음을 자기가 설명했다.
그 친구와 나는 중1 때 처음이자 마지막 검정 교복을 입은 세대다. 80년대 자율화 열풍으로 중2부터는 교복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미리 알지 못한 친구 할머니는 3년은 입을 수 있게 품이 큰 교복을 사주셨고 덕분에 내 친구는 풍덩거리는 교복을 입어야 했다. 그 웃픈 기억을 우린 공유한다.
그리 풍족하지 않았던 20대 젊은 날도 우리는 늘 서로의 지지자였다. 교대를 졸업하고 첫 월급을 받아 가장 먼저 나에게 밥을 사준 친구. 그때 먹었던 잡채밥을 우린 가끔 이야기한다. 만나면 금방 또 헤어져야 하지만 할 말은 끝이 없다.
그 친구가 어느 날엔가 문득 내 이야기 끝에 '바라지 마라! 기대하고 바라니까 문제가 생기더라'했다. 자기는 모든 걸 내려놓은 지 오래되었다고, 그랬더니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맞았다. 불편함 언짢음 때로는 화나는 모든 상황이 기대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일은 내가 하면 되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안 하면 되는데 누군가에게 바랄 때 문제가 됐다. 내가 한 만큼 기대하여 왔음을 깨달았다. 그게 욕심이었다.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그 친구는 그렇게 간혹 던지는 말로 나를 키운다. 그 친구의 말은 마음을 다치지 않고 이해된다. 새삼 다른 사람에게는 어떤지 돌아봐졌다. 다른 사람의 말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다른 이에게도 고른 기회를 줘야 한다. 불편함을 줄이려면 바람과 기대도 없어야 하지만 누군가가 하는 말에 어떠한 감정도 개입시키지 않고 받아들여야 한다. 욕심을 내려놓는 것만이 아니라 만나는 사람에게 편안하고 온화한지, 색안경을 끼고 있지는 않은지도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