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서자 싸하니 얼굴에 한기가 닿았다. 대여섯 명이 앉을 만한 곳으로 얼른 자리를 잡았다. 투명 유리창 앞에 선 동백나무 생생한 나뭇잎 사이로 쌩한 햇살이 비춰든다. 바깥은 열기로 끓는데 저 이파리들은 더 싱싱하다. 어떤 난관도 무언가에는 쓰임이 있는 걸까. 얼굴과 팔다리에 감긴 열기가 서서히 식고 이제야 제대로 숨을 쉬게 해 준다.
가장 먼저 온 사람이 역시나 그녀였다. 일과 후 저녁에만 모이다가 모처럼 이른 시간에 만나기로 한 거였다.
"반가워요!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가장 먼저 오시는군요!"
"제가 좋아하고 기대하는 모임이라서 그렇죠"
먼저 건넨 인사에 경쾌한 답이 돌아왔다. 물꼬를 튼 대화가 쉴 새 없이 계속됐다. 마치 둘이서만 만나기로 한 것처럼.
그녀는 자신이 이 모임에 왜 참석하게 됐는지부터 말했다. 어떤 도움이 되었으며 앞으로는 어떤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기대감까지 늘어놓는 그녀는 가슴속에 커다란 이야기보따리를 숨겨놓은 듯했다. 자연스레 그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착한 아이였단다.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하니 칭찬받았고 선생님이 가르치는 대로 하니 공부도 뒤떨어지지 않았단다. 잘 듣고, 따라 하며, 그게 잘하는 거라고 여겼단다.
"대학에 입학하고 첫 학기에 수강 신청이라는 걸 하게 되었을 때였어요. 1 학기 수강 신청을 하고 난 뒤에 나에게 성격장애가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단짝 친구가 그대로 수강 신청을 하고는 2학기에 내내 헤맸어요. 그런데도 제 성격은 크게 변하지 못하고, 친구들과 옷을 사러 가거나 신발을 사러 가면 늘 남의 이야기를 듣고 괜찮아 보인다고 하면 그걸 선택했어요."
나는 그럴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고, 직장을 다니면서도 남의 말을 먼저 듣는 것이 잘하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 얼굴에 억울함이 비쳤다. 남편 의견을 잘 따랐고, 친정 의견과 시댁 의견을 따랐기에 크게 어긋남 없이 지나왔지만 스스로 결정하는 일 앞에서는 자신이 어린아이 같더란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사건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 일어났다고 했다.
"어느 날 친구와 옷을 사러 갔어요. 매장에서 분명 내가 입고 싶은 옷을 한 손에 들고선 집에 와서 보니 친구와 주위 사람들이 권하는 옷을 사 왔더라고요. 그러고 밤 새 사 오지 못한 그 옷에 미련이 남았어요. 옷값으로 쓴 돈보다 더 비싼 깨달음을 얻게 되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남의 눈을 먼저 생각하는 저를 보게 된 거예요."
그녀는 두 볼이 발개져서 말했다. 온다던 사람들은 아직도 오지 않고, 하나 둘 참석이 어렵다는 문자들만 날아왔다. 우리 둘이 이야기 나눌 기회를 주는 건가? 그녀는 더 진지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나 자신을 돌보기로 했어요. 스스로 결정하게 되면서 세상이 달라 보였거든요. 이 모임도 제가 선택해서 들어왔어요."
바깥은 30도를 웃돌며 바글바글 끓고 있고 시원한 카페에 앉은 두 여성의 마음은 무언가를 향한 열정이 치솟고 있었다.
"동병상련이에요."
내가 추임새를 보태자 그녀는 더욱더 신나 자기 이야기를 했다.
"이제는 입고 싶은 옷은 마음대로 입어요. 언제 어디든 오가면서 배우고 싶은 건 찾아가 배운답니다."
어떤 더위가 오든, 어떤 추위가 오든, 그녀는 용감하게 맞서 나갈 선봉대 같아 보였다. 그런 열정들이 그녀 속에 숨겨져 있었을 뿐, 상처 입거나 도태되지 않은 듯했다. 그 열정이 있었기에 지금껏 그녀가 주위 의견을 적극적으로 따르고 수용했는지 모른다.
"이제부턴 저의 뜻을 먼저 내 걸어 보려고요!"
그녀 눈빛이 반짝거렸다. 두세 시간을 훌쩍 넘기고 카페를 나오면서 바라본 그녀 뒷모습이 북극성처럼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