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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조와 덕이 Jul 29. 2024

지우고 싶은 순간이 있으신가요?


싸하니 얼굴에 닿는 한 기가 고마웠다. 얼른 대여섯 명이 앉을 만한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쨍한 햇살이 투명 유리창 앞에 선 생생한 나뭇잎 사이로 비쳐든다. 바깥은 정말 끓어오르는데 저 이파리들은 더 싱싱하다. 어떤 난관도 어딘가에는 필요하고 쓰임이 있는 걸까. 얼굴과 팔다리를 감던 열기를 비집고 들어선 카페는 이제야 제대로 숨을 쉬게 해 준다. 


가장 먼저 온 사람이 그녀였다. 일과 후 저녁에만 모이던 사람들을 모처럼 이른 시간에 만나기로 한 것이다. "반가워요!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가장 먼저 오시는군요!" "제가 좋아하고 기대하는 모임이라서 그렇죠" 건넨 말에 경쾌한 답이 돌아왔다. 물꼬를 튼 이야기가 쉴 새 없이 계속됐다. 마치 둘이 만나기로 한 것처럼.


왜 이 모임에 참석하게 됐는지부터 어떤 도움이 되었으며 앞으로는 어떤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기대감까지 늘어놓는 그녀는 가슴속에 이야기보따리를 숨겨놓은 듯했다. 자연스레 그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착한 아이였단다.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하니 칭찬받았고 선생님이 가르치는 대로 하니 공부도 뒤떨어지지 않았단다. 따라가고, 따라 하고, 그게 잘하는 거라고 여겼단다.


대학에 입학하고 첫 학기에 수강신청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을 때, 1 학기 수강신청을 하고 난 뒤에 자신의 성격장애를 처음 깨달았단다. 단짝 친구가 하는 대로 수강신청을 그대로 따라 하다 보니 2학기엔 헤맸단다. 그럼에도 그 성격은 크게 변하지 못하고, 친구들과 옷을 사러 가고 신발을 사러 가도 늘 남의 이야기를 듣고 괜찮아 보인다고 하면 선택했단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고 직장을 다니면서도 남의 말을 먼저 듣는 것이 잘하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그녀의 얼굴에 억울함이 비쳐갔다. 남편의 의견을 따랐고 친정 의견을 따랐고 시댁 의견을 따랐기에 크게 어긋남 없이 지나왔지만 스스로 결정하는 일 앞에서는 자신이 어린아이 같더란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사건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 일어났다고 했다. 


친구와 옷을 사러 간 매장에서 분명 자신이 입고 싶은 옷을 왼손에 들고서도 친구와 주위사람들이 권하는 옷을 사 왔더란다. 그러고 밤 새 사 오지 못한 그 옷에 미련이 남았고, 쓴 돈보다 더 비싼 깨달음을 얻게 되었단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보다 남의 눈을 먼저 생각하는 저를 보게 된 것이다. 


그녀는 두 볼이 발개져서 말했다. 온다던 사람들은 아직도 오지 않았고, 하나 둘 참석이 어렵다는 문자들만 날아왔다. 우리 둘이 이야기 나눌 기회를 주는 건가? 그녀는 더 진지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자신을 돌보기로 했단다. 스스로 결정하게 되면서 세상이 달라 보였다는 것이다. 이 모임도 자신이 선택해서 들어왔다고 했다.


바깥은 30도를 웃돌아 바글바글 끓고 있고 시원한 카페에 앉은 두 여성의 마음엔 무언가로 향한 열정이 치솟고 있었다. '동병상련' 추임새를 보태자 그녀는 더욱더 신나 자기 생각을 말했다. 이제는 입고 싶은 옷은 마음대로 입는단다. 언제든 어디든 가고, 오고, 배우고 싶은 건 찾아가 배운다고 했다. 


어떤 더위가 오든 어떤 추위가 오든 용감하게 맞서 나갈 선봉대 같아 보였다. 그런 열정들이 다만 숨겨져 있었을 뿐, 상처 입거나 도태되지 않은 듯했다. 그 열정이 있었기에 주위 의견들을 적극 따르고 수용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추진에 힘을 보태지 않았을까. 이제는 자신의 뜻을 먼저 내 걸어 보기로 했다는 그녀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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