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기감이 또 이런 경우도 있다. 손에 실려 그려지는 글자가 긋는 대로 모양을 낸다. 수년 전 누군가 자신의 이니셜이 있는 만년필을 쓰려느냐고 줬는데 이후로 처음 잡아본다.
지금 이 글자를 그리고 있는 만년필은 크기부터 큼직하다. 큰 손에 느낌 좋게 잡힌다. 잉크를 채우기도 쉽다. 손에 없으면 금단현상까지 느끼는 애용하는 ***볼펜보다도 시원하게 그어진다. 날렵한 펜촉 모양이 잉크를 묻혀 썼다는 뾰족한 펜촉보다는 조금 작다. 하얀 종이를 콕 찍으며 사각사각 그어지는 느낌을 나누고 싶다. 종이에 뜻대로 글자를 남기며 달려가는 이 펜은 이제 다른 펜으로는 쉬 대체가 안될 듯하다.
기성품이다. 이런 유의 펜이 많을 텐데 사나흘 전 만났다. 어떻게 왔느냐! 회의실에서 나란히 앉아 눈독을 들이다가 같이 들여다봤다. 그러다 셋이 골고루 하나씩 선물 받았는데 붉은색 푸른색 검은색이다. 마음에 들면 가지라는 이는 무난한 펜을 들고도 잘 적고 있었다. 어른들이 아이처럼 마주 보고 웃었다. 물품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갖가지 능력을 보여주고 마술도 부린다.
그 옛날 볼펜의 대명사인 모나* 볼펜은 필기감이 미끌미끌했다. 어지간히 힘을 주지 않으면 바로 서 있는 글자를 쓰기 어려웠다. 그 볼펜을 쥐고 언제나 한자를 연습하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미끈거리는 종이, 달력 뒤에 글자를 쓰려면 펜은 또 얼마나 미끄러웠을까? 어지간히 힘든 게 아니었을 것이다. 글자 쓰기 쉬운 펜을 좀 사드렸으면 좋았다.
요즘은 손에 힘을 크게 들이지 않아도 잘 써지는 펜이 정말 많다. 오늘도 아버지 대신 실컷 쓴다. 상호도 모르겠는데 '패션 만년필'이 잘 써지니 아버지 생각이 더 난다. 눈처럼 흰 종이에 사각사각 생각나는 대로 하고 싶은 말을 그리다가 이렇게 브런치에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