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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은 어떤 경우일까?

by 사과꽃


- 최은영 작가의 장편소설 '밝은 밤'을 읽고 -



밤은 어둡기 마련인데 '밝은 밤'이라니, 전등불이 밝은 밤인지, 잠 못 자고 지새운 밤을 말하는지, 캄캄하고 어두운 세상에 그래도 지켜낼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말인지. 제목이 주는 의문점을 가지고 뒤적인 책은 잡는 순간부터 놓을 수가 없다. 궁금하여 숨 가쁘게 넘기게 는 매력이 있다. 글자가 번져 보이고 허리가 아파 눕고 싶어도 누워서 배 위에 올려놓고도 읽은 책이다.



울컥하고 분노하면서 우와를 삼켜가며 읽었다. 주요 등장인물은 여성 7명이다. 삼천이 - 영옥이 - 미선이 - 지연이, 이렇게 4대 여성과 삼천의 친구 새비 아주머니와 그녀의 딸 희자가 나온다. 희자의 고모할머니 명옥도 있다. 가장 몰입하게 되는 사람은 아무래도 주인공 지연이다. 이혼하고 상처 투성이로 희령이라는 곳에 가게 된다. 희령에서 엄마가 남처럼 지냈던 할머니 영옥을 만난다. 이혼하게 된 배경이 설명되지만 좀 부족하다. 상처 준 전 남편이 어찌 살아가는지 설명이 없어 아쉬웠다. 그렇게 상처 주고 안하무인인 사람들이 넘쳐나서 그런 걸까? 끝내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지연이의 엄마가 더 이상 찾지 않았던 할머니 영옥을 만나면서 스스로 치유해 가는 과정이 긴박하게 흘러간다. 단 시간에 완독 하게 되는 이유는 넘친다. 일제 강점기 전후의 혼란스러웠던 시대도 나온다. 여자들의 삶이 얼마나 척박했는지, '여자 팔자 뒤옹주 팔자'라는 말이 비단 여자들만 옭맸는지 읽은 사람은 생각이 많아질 것이다. 저자가 이런 말을 한다. '해가 하늘 꼭대기에서 빛을 뿜어내고 그 빛을 반사한 강물이 눈이 시릴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 나를 더 아프게 한 건 나에 대한 나의 기만이었다.'




저자의 나이를 검색해 보니 84년생이다. 그러면 이제 막 40세를 넘겼다. 그 나이에 어찌 이런 글을 쓸 수 있을지 더 검색해 보니 다수의 문학작품 상을 받은 인재다. 나이가 궁금했던 건 여성 4대에 걸쳐서 대한민국에 만연한 여성 천시 풍조를 적나라하게 그려 내서다. 그 나이쯤에서는 모를 법한데 말이다. 한때 인기리에 읽혔고 영화로도 만들어진 '82년생 김지영'과 관통하는 부분이 있다. 여전히 진행형인 아픔은 이렇게 많이 쓰고 읽고 나누어야 치유가 될 것이다.



바람을 핀 남자의 잘못으로 이혼을 했음에도 친정엄마나 친정아버지가 진정으로 딸을 걱정해주지 않는다. 그저 창피하게 생각한다. 시모가 며느리를 벌레처럼 비유해도 듣고 외면하는 남자를 남편으로 살았으니 스스로 얼마나 끔찍했을까? 지연의 부모도 시모도 딸 며느리 마음을 공감하지 않았다.



곳곳에 나오는 이기주의 적인 사회도 보인다. 교사들이 없는 집 아이들만 골라서 괴롭히기에 그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해 버텼던 엄마 세대를 저자는 너무나 리얼하게 표현했다. 저자의 엄마세대가 곧 나의 웃 세대이기에 쉽게 알 수 있었다. 우리가 학교 다니던 때 교사들은 없는 집 자식이 쓴 시나 시화를 훔쳐서 잘 사는 집 자식의 작품으로 만들고 시화전까지 열어 골마루에 걸기도 했으니까.



그 시절 초등학교 5학년 6학년 자매였고 2학년 막내의 작품을 우리는 도둑맞은 기억이 있다. 따지려 하다가 자녀가 3명이나 다니는 학교에 이의를 제기하면 아이들이 손해라는 결론으로 우리 부모는 없던 일로 접었다. 수년이 흐르고 그 여교사가 남편과 중학생 자녀를 데리고 버스에 탑승한 걸 본 적이 있다.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밝은 밤'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보여준다. 여성 비하의 문화는 결코 남성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없이 살았고 힘들게 살았던 우리 근현대사를 건너온 인물들을 보여줬다. 잘못된 문화는 다수가 공감하고 바꾸려 할 때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소설 '밝은 밤'이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지 않을까.




희령이라는 도시 천문학연구소에 주인공 지연이 연구원으로 오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왜 개새끼라고 하나? 개가 사람한텐 너무 잘해줘서 그런 거 아닌가. 아무 조건도 없이 잘해주니까, 때려도 피하지 않고 꼬리를 흔드니까, 복종하니까, 좋아하니까 그걸 우습게 보고 경멸하는 게 아닐까. 그런 게 사람 아닐까. ~ 개새끼라는 단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나 자신이 개새끼 같았다.'( P13)



'내가 보였다'는 말, '사람들이 남자에게 쉽게 공감한다'는 말, '남자가 바람 한 번 피웠다고 이혼이라니 말도 안 된다. 김서방이 받을 상처를 생각해라. 마음을 넓게 먹어야지, 사람들 다 그러고 살아'라고 엄마라는 사람이 말한다. 딸의 상처는 보지 않는다. 그 부분에서 나는 하하하 웃음이 나왔다.



새비 아저씨가 죽고 새비 아주머니가 딸 희자를 데리고 찾아간 개성에서 내쳐졌을 때, 딸을 데리고 대구 고모할머니를 찾아가는 길에 바들바들 떨었다. 추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떨고 있음을 딸은 알아챘다. 무서워서 떨면서도 딸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기는 사람이 어머니다. 딸을 뒷바라지하며 서울로 보내 공부시킨 그 어머니는 딸에게 '갈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가라'라고 했다. '본인이 느꼈던 현실의 중력이 더는 작용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딸이 더 가벼워지고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랐을 것'이라고.



'우리가 서로를 영원히 알아낼 수 없으리라는 사실'은 젊은 희자를 절망하게 했지만 나이 든 지금은 위안이 된다고 쓴 노년의 희자할머니 편지를 보며, 사람관계에서 모든 걸 한 순간에 다 이해하려고 할 필요는 없음을 느꼈다. 가까운 사람이라고 모든 걸 다 이해받기 바라거나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도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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