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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정리하면서 남는 것

by 사과꽃


큰아이가 내려오는 주말이면 식단을 짰다. 있는 동안 먹을 집밥을 제법 세세하게 적고 주중에 틈틈이 장을 보기도 했다. 그러면 매끼마다 제법 윤택하게 차려냈는데 그마저 나이가 든 걸까? 이번에는 아이를 보고 좋아라만 하다가 제대로 밥 한 끼 못해먹이고 보내고 말았다. 금요일에는 한시라도 일찍 보려고 한 밤에 터미널에서 기다리고 태워와서는 몇 끼 사 먹다 보니 시간이 다 갔다. 휴가도 연휴도 아닌 더운 주말에 내려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15여 년을 산 집을 이제 다음 주면 떠난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살던 집을 하루라도 자본다고 내려왔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이 집에서 요리한 음식이 얼마인가? 주말이면 갖가지 채소들을 사서 나물을 만들었다. 겉절이도 몇 가지 하면 한 주간 먹을 찬들이 유리통을 꽉 채우고 냉장고를 채웠다. 현미와 콩을 놓은 밥에 된장찌개 나물 찬을 아이들은 잘 먹었다. 그래서일까? 감기를 덜했고 편식도 없다. 무엇보다 김장김치를 좋아하고 내가 만든 음식은 뭐든 잘 먹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외식도 자란 것 같다. 입맛이 바뀌고 바빠지면서 집밥도 자연스럽게 줄었다. 이사 준비하면서 정리한 것 중 가장 많은 것이 그릇이다. 깨지지도 못쓰게 되지도 않아 언젠가는 쓸 듯한 찬 그릇들이 찬장에 빼곡했다. 근년에 사용하지 않은 것은 모두 내놓고 마음을 비웠다. 당장 활용하는 그릇을 빼고는 냄비며 프라이팬까지 담아내고 보니 찬장에 빈 곳이 생겼다. 그렇게나 안고 살았을 줄이야.



그릇을 싸내고 두 번째로 한 일이 화분을 정리한 일이다. 아이들의 나이만큼 된 화분도 있고 화초가 자라면서 분갈이를 하다 보니 화분은 모조리 덩치를 키웠다. 거실의 반을 차지할 만큼 식물을 좋아해서 뒷 베란다에는 버리지 못한 빈 화분에 흙도 많았다. 부끄러운 일이다. 퇴근 한 하루 저녁 우리는 그 화분을 내리는데 열중했다. 레몬나무를 아파트 아래에 심기로 했는데 흙을 파는 첫 삽에 어이없이 꽃삽이 부러지고 말았다. 화단의 흙이 그렇게나 단단한 것을 이번에 알았다.



이불과 옷을 싸내는 날도 하루저녁이 소요됐다. 아파트 아래 헌 옷 수거함 덕을 톡톡히 봤다. 또 하루는 책을 싸냈는데 그건 정말 중노동이었다. 무게와 양이 얼마나 많던지 작은 아이까지 합세하여 셋이 몇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몇 번인가 정리하면서 번번이 다시 꽂혔던 책과 파일들이 이번에는 정리됐다. 아끼고 보관하면서 한 시절을 같이 보낸 것들은 시간이 지나니 보낼 수 있게 됐다. 이사는 그래서 필요한 가 보다. 방마다 공기가 달라졌고 우리 집이 이렇게나 넓었는지 지금 모델하우스 같은 집에 산다.



큰아이에게도 변화된 집 사진을 보내기도 했는데 실물을 보고는 '우와' 했다. 정리의 맛과 멋을 오롯이 누린다. 살면서 바꾸던 가구 배치와 정작 떠날 준비를 하면서 하는 가구 정리는 비교 불가다. 이사 가는 집만큼 새집으로 거듭 난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재주꾼인 신랑이 전세 들어올 분들을 위하여 틈틈이 집을 꾸민다. 욕실 문이며 벽장의 시트지를 교체하고 빈 벽에 도배까지 하고 있다. 이렇게 좋은 집을 내참 이사를 안 갈 수도 없고.



추억이 많은 집이다. 아이들만 자란 게 아니라 가족 모두가 성장한 집이다. 궂은일도 밝은 일도 많았다. 안고 있던 물건들 하나하나에 사연이 쌓여가며 우리를 서게 했고 힘이 되어줬고 지켜봤을 것이다. 어느 하나 귀하지 않음이 없겠으나 나무의 새순이 돋고 가지가 자라도록 곁가지는 잘라주어야 한다.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놓을 건 놓아야 한다. 다만 어느 하나도 홑으로 된 게 없으니 그 정다움과 고마움은 가슴에 남긴 채 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사도 짐 정리도 또 다른 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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