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며
항해
빛으로 멱을 감은 섬들
at 크레타
빌린 책에 줄은 못 치고 이면지를 놓고 옮겨 쓴다. 가장 짧은 문장이 위 글자다. 수년 전 빌려와서 읽다가 주인공이 바람 부는 섬의 산책로를 걸으며 읊는 부분에서 접었던 책이다. 터덜터덜 발을 떼며 말하는 내용을 따라갈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책을 접으며 다짐은 했다. 언젠가 다시 꼭 읽어보리라고. 다시 읽고 싶게 끄는 매력이 있는 책 '그리스인 조르바'다.
봐야 할 책이 산더미고 읽어야 할 책이 무더기여서 도저히 장편 소설로 분류된 저 책을 읽을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여유가 좀 생긴 것인가. 그도 아닌데 거의 두 새해 흐른 지금 문득 모든 걸 접고 읽고 싶었다. 일도 사람도 여전히 주위에 많고 정신이 번잡한 건 변함이 없는데 뭐가 이 책을 끌어당긴 건지. 저자인 니코스 카잔자키스는 그리스 국적의 소설가 극작가 철학자이며 정치인이었다.
1883년데 태어나서 1957년에 떠났으며 노벨문학상 후보에 아홉 차례 올랐다. 1946년 노벨문학상에 1표 차이로 떨어졌는데 수상자는 알베르 카뮈였다. 카뮈는 나중에 말하길 카잔차키스가 자신보다 수백 배는 더 이 영예에 마땅하다고 했단다. 번역서가 이 정도로 심금을 울리니 원서의 묘미는 어떠할까. 소설이 이 정도로 절절할 수 있는지, 사실에 바탕을 둔 이야기 '그리스인 조르바' 이제 겨우 10분지 1 정도를 넘기는데 옮겨 쓰고 싶은 부분이 너무 많다.
옮겨보는 단어나 문장은 평소에 자주 접하지 못한, 그래서 신선한 말이다. 간혹 배를 타보고 섬을 방문하고 바닷물에 일렁이는 빛살에 눈을 감아 봤지만 섬과 바다와 항해라는 단어를 평소에는 잊고 산다. 그리스와 크레타라는 지명을 찾아봤다. 크레타는 지중해 동부, 에게 해 남부의 섬이다. BC 1450년 경에 그리스에 정복됐고 올리브 포도 감귤류 구주콩 등을 그리스 본토로 수출하며 관광업이 주요 수입원이다.
'이 세상에는 여자, 과일, 생각들과 같은 즐거움들이 많이 있지만 가을의 부드러움과 각 섬 이름을 하나하나 중얼거리면서 이 바다를 항해하는 것보다 우리 마음을 천국으로 깊숙이 잠기게 하는 기쁨은 없다.' P38
'세상 어느 곳에서도 이렇게 평화롭게 쉽게 현실의 세계에서 꿈의 세계로 옮겨 갈 수 없을 것이다.'
'시원하게 목욕을 마친 부드러운 태양이 구름을 헤집고 사랑하는 바다와 대지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부처에게서 벗어나 모든 형이상학적인 낱말들을 내려놓고 자유로워지기. 지금 이 순간부터 맑은 정신으로 돌아와 사람들과 진정으로 사귀기'
마지막 문장에서는 '사람들과 진정으로 사귀기'라는 말에 꽂혀서 옮겨보았다. 어떤 글이든 어떤 말이든 제각기 제 형편에 맞는 부분에서 받아들이고 수긍하고 느끼니까, 새삼 사람들과 진정으로 사귀기란 어떤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수년 전에 만났던 책을 다시 만날 때는 일정 부분 그때 그 사람이 아닌 것처럼 같은 글도 제 키만큼 감정이 동한다. 마치 수년을 살아온 공간에서 어느 날 혼자만의 세상을 발견하는 느낌처럼.
뜻대로 살아왔는데 섞이지 않았고 섞이기를 거부했을지도 모르는 일상을 발견했다면 그마저도 잘한 것이다. 괜스레 발을 딛고 있는 생활에서 뭔가 잘못 살아왔는가 하는 의문점도 필요 없다. 일상이, 모두의 생활이 겹치고 그 교집합이 얽혀서 무늬를 만드는 것이다. 교집합이 좀 없으면 어떤가. 제각기 자기만의 공간을 그려가면 되는 것이다. 소설은 그런 생활을 응원하는 것 같다. 소설 속에 빠지면 지금 자기가 그리고 있는 영역을 돌아보게 되고 음미하게 되고 채색할 힘을 얻게 된다.
책을 따라가다가, 문장들을 옮겨 쓰다가 문득 쓰고 싶고 말하고 싶었다. 쓰고 싶은 마음이 먼저였는지 말하고 싶은 마음이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펜을 들고 하얀 종이에 뭔가 적어가는 느낌은 정말 좋다. 끝없이 뭔가를 쓰고 싶다. 펜을 던지고 자판 위에서 활자를 만들어 가고 있지만 이제 다시 소설로 가서 조르바와 대화하는 이의 시선을 따라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