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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래울 Aug 20. 2022

김수영을 읽으며 문득 반성

은퇴일기 5

 의정부에서 금촌으로 오는 평안운수 버스 뒷자리에 앉았다가 옛날 중2 담임을 했던 아이를 10년 만에 만났다. 모습이 크게 변치 않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옆에 앉히는데 동시에 터져나온 녀석의 첫 일성이 아우~ 그때 정말 무지하게 아팠어요였다.

 한겨레신문이 창간되던 그때, 아이들을 패는것이 아무렇지 않고 어쩌면 생활지도 능력처럼도 여겨지던 그때, 남중 아이들의 귀여움을 수집하던 초짜 교사인 나는 아이들의 버릇을 고치라는 훈수를 자주 듣곤 했다. 그렇게 키워 올려보내면 다음 사람이 힘들다, 못하겠으면 학생부로 보내라 등. 요즘 세간에 회자되었던 짤짤이라는 동전접기 내기가 문제가 되어 걸리는 대로 학생부 지도를 하며 단속을 하던 때라 단단히 주의를 주었음에도 중2 교실에서 판돈이 너무 불어나 커졌다는 제보가 들어왔고 학생부에 보내지 않기 위해서는 담임선에서 강력한 한방 액션이 불가피하였다. 더구나 그 아이들은 반에서 한몫하는 아이들 집단이어서 공정을 모토 삼던 담임이 어떻게 하나 보자는 아이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져 왔다. 아이들을 때려야 하는데 겨드랑이가 붙어 쩔쩔매는 꿈을 꾸며 나름 받아오던 스트레스와 아이들에게 어설프게 혼내는 것은 아니 함만 못하단 충고 등이 합쳐져 서툰 매질로 뿜어져 나왔으리라.

 자신을 칭칭 동여매던 결기와 소신은 결국 타인의 시선에 끄달려 한 방에 날아가고, 궁지에 몰린 무능감을 수동적인 졸렬함으로 대체하였을 것이다. 때리는 것보다 진심 어린 설득이 잘 통했을 아이들이었음에도 그동안의 무른 자신의 방식에 복수라도 하듯 거부해 오던 방식에 단번에 투항하고 만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죄책감이나 양심 등으로 재갈 물리고 자신에게는 쓱 입 닦아 외면하여 묻혔던 사건이 10년 만에 볼썽사납게 소환된 것이었다.


 돌아보면 자기 입장을 견지하지 못하고 최소한의 자기 설득도 거치지 않은 채 치마 뒤집어쓰고 인당수로 뛰어드는 전법이 패턴이 된 것은 아닐까 의심되는 장면들이 있다. 하루아침에 입장과 태도가 바뀌면서 시스템을 핑계로 일상 속에서 저지르는 한 사람의 무사유한 행위가 얼마나 무거운 의미를 갖고 전파되는지, 더구나 그것이 아이들을 상대로 할 때는 영향력이 얼마나 증폭되는지 반성하지 못했다. 한 눈 질끈 감고 묻으면 그만이었다.

 

 김수영은 생활고에 시달리자 아내에게 포르노 소설을 쓰도록 시키고 잘 썼다며 출판사에 들고 나가 받은 돈으로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고 와, 기가 막혀 화가 난 아내에게 울면서 다시는 이런 일을 시키지 않겠다고 사무치게 빌었다고 한다. 김수영이 쓴 '긍지의 날'이라는 시에서도 고통과 설움의 상황에 복종하지 않고 맞서서 책임지려면 무조건 긍정이 아닌 설움을 곱씹는 긍지가 필요하다고 하고 있다.     


절망                     

                        김수영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이 시에서는 풍경과 곰팡과 여름과 속도와 졸렬과 수치가, 절망이 다 반성의 대상이다.

 김수영을 빌어 반성해 보자, 주체로 살지 못하고 타인의 풍경 안에서 변치 않는 포즈로 조직의 핑계를 댄 것도, 옆으로 비껴 그림자처럼 숨었던 것도 풍경으로서 반성할 일이 된다.

 내가 곰팡이처럼 기생하여 꽃인 듯 피워대면서 숨겼던 더러움이나 역겨움의 순간은 또 언제였을까, 작은 명분을 얻기 위해 외면했던 진실들, 세심하게 염려하는 일 처리를 하지 못해 불우이웃돕기 따위의 경제적 지원을 빌미로 상처를 준 아이들도 떠오른다. 삐끗하면 제도나 시대의 야만 때문인 듯 눈가리고 아웅했지만 얼마든지 더 나은 해결의 여지가 있던 일 들이었다.

 여름은 또 나에게 무엇일까. 꽃이 만발한 여름의 한때를 지날 때, 뭔가 책임도 좀 무겁고 여기저기 역할을 해야 했을 때 말이나 속도를 휘두르며 재촉하거나 내 판단의 확신으로 몰아간 것도 어찌 기억나는 것만 있으랴.

 

 어떤 회한은 빈집 구석에 금 간 항아리 사이로 슬금하게 새어 나오고, 어떤 반성은 4월 꽃 위로 내리치는 돌풍의 눈발처럼 가차없이 쏟아져 들어온다. 아직도 졸렬과 수치를 반복하면서도 반성은 뭔가 꺼림칙해 들추기 싫고 자동적인 합리화가 절망을 앞지르기 일쑤다. 온갖 것 다 헤집어 들키고 털리고 터뜨려져 나를 휘젓는 소용돌이를 고스란히 감내하며 반성한다면 황홀이 가벼이 저 하늘에 다가들 수 있겠지만 날 받아 놓은 듯 성급한 반성이 아니면 또 어떠리. 통속적이고 부실한 채로 무너져 흘러내리는 것들과 함께 낮은 포복의 다육이나 사부작사부작 키우며 기울어져 가는 거지, 낡고 망가지고 반성할 거 많다고 해서 억만금을 줘봐라 너하고 바꾸나, 나는 내가 네가 아니고 허름한 나인 것이 참말로 다행이라 여기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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