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일기 6
「 그동안은 나는 늘 사십대였다
참 우습다
내가 57세라니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
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
-최승자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 중에서 「참 우습다」일부-
오래 전 시골길에서 어린 아들을 손잡아 걸리고 가는데 어떤 백발의 노인이 “야 이놈아 나도 너만 할 적이 있었어” 하고 소리치며 지나갔다. 나이 차이 80살 이상은 족히 날 어린애를 보며 늙지 않은 날것의 마음으로 속절없는 인생에 훅을 날리는 듯한 갑작스러운 고함이었다.
‘늙어가다’라는 동사가 아니라 ‘늙음’이라고 명사화하는 이데올로기는 나이 든 사람의 욕망은 변하지 않으나 욕망을 표시하는 것에는 혐오하는 이중성을 불러온다고 박구용 교수의 강연에서 들었다. 나이 들기 싫어하는 연령주의에 대한 사이비 복수가 사람들을 늙음의 이데올로기에 포섭시켜 피터팬 콤플렉스 안에서 늙음을 유폐하고 배제하려 드는 오늘날의 세태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설파하였다.
이중적 잣대로 타자화 했던 늙음의 나이로 나도 진입해서였을까, 강의 속에서 소개된 늙음의 이데올로기의 이중성을 벽에라도 붙여놓고 싶은 심정으로 옮겨보았다.
1. 노인들에게 의무와 책임은 동등하게 요구하면서 욕구와 감정은 줄이고 절제하길 바란다.
2. 노인은 지혜로워야 하되 말은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3. 노인에게 효도를 받으라 아우성치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정신과 육체가 쇠약해 늙었음을 깨닫도록 강요한다.
4. 돈벌이 못 한다고 무능하다고 유폐시키고 폄하, 감금시키면서 노인들을 상대로 한 상품은 늘어나고 있다.
5. 노인에게 편안하게 살라고 하면서 활동하지 말고 현존만 하라고 한다.
6. 돈벌이 못하는 무능한 퇴물 취급하면서 노인 사업과 산업을 개발한다.
7. 집행 유예 상태의 사형수들의 사물화, 상품화가 노인을 상대로 이루어진다.
‘은교’에서도 노욕이라 지탄받은 노교수가 “너희 젊음이 너희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나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노인이 현실에서는 욕구와 감정을 느끼든 말든 표현까지 하는 것은 솔직한 것이 아닌 주책이 된다. 마음이 늙지 않은 겉으로만 늙은 이들의 상처는 오롯이 홀로 감당하고 처리할 몫이다.
농경사회에서는 오래된 경험으로 물을 관리하는 노인을 대체적으로 존중했다지만 요즘은 경험과 지혜의 훈수를 인생 선배랍시고 했다가는 꼰대가 되는 건 순간이다. 나이 장벽이 섬세하게 나뉘어 초등학교 고학년생이나 20대 중반 연예인도 원로 늙은이 취급을 받는다고 한다. 누구의 지혜도 듣고 싶어하지 않으니 노인이 말을 줄이는 것은 더욱 필수적인 지혜가 돼버렸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노인의 지배력을 무화시키는 언행이 대놓고 자행되고 듣는 노인은 아연실색하면서도 못 들은 척하는 것이 미덕이 되기도 한다. 섞일 수 없는 존재로서 치욕이나 모욕을 매해 더 얹어가며 스스로에게도 낯선 노인이 되어가는 자신을 감당하기 어려울 테니 어떤 방식으로든 셀프 구원을 시작해야 한다.
마음은 ‘팔랑팔랑 포르르포르르’ 한데 몸이나 타인의 시선은 ‘흐르르흐르르’한 사이 어디쯤 기억의 집을 짓고 나를 초대해야 한다. 그 집에서는 이불킥하는 처참한 기억이 느닷없이 튀어나와 내 목을 조르고, 억울하게 목이 잠긴 노래들이 밤새 유리창을 흔들고, 갑자기 기억의 깊은 어둠 속에서 슬픈 얼굴들이 떠올라 밤새 울고 동틀 녘에서야 푸석한 잠에 빠질지도 모른다. 어떤 깨방정을 떨고 푸닥거리를 하든, 일부러 지우고 살았던 처참하고 흉측한 내가 되살아나 어떤 추궁을 하든 다급하게 타협하지 않고 바라볼 것이다. 오래 잠겼던 문이 열리고 아무런 장애 없이 지금의 나를 그때의 나에게 데려가 주기를, 앞으로 나타날 귀인 말고 내 삶을 스쳐 간 귀인들을 찾아 어둡고 뜨거운 인사를 나누게 되기를 바랄 것이다.
바쁘다고 밀려났던 문제들과 재밋거리들을 늙음의 정원 안에 들여놓고 찬찬히 끼고 앉아 남은 볕을 즐겨볼 것이다. 양지쪽으로 꼬물꼬물 기어 나오는 온갖 나의 유충들이 제모습 제 빛깔을 띠며 변태되어 날아갈 때까지 징그러움도 부끄러움도 견뎌볼 것이다. 나방이든 파리이든 휴지기의 번데기이든 생의 조건을 차단하지 않고 놓아 기를 것이다. 음습하고 화창한 존재의 합창 소리를 기억의 집 정원에서 날이 저물기 전에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황홀할 것인가, 고요한 침묵 속에 잡초처럼 오그라져 누렇게 말라가더라도 홀로 푸짐할 것이다.
「조지프 캠벨은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다만 우리가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며 융과 마찬가지로 노년기를 인생의 감소기로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개의 시기로 보았다. 우리가 인생이라는 컵을 가득 채우고 태워 버릴 것은 다 태워 버렸다면 노년의 고요는 오히려 반가울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했다면 우리는 노년의 문턱에 도달해서도 뭔가 불만족스러운 욕구 때문에 눈길을 자꾸 뒤로 돌리게 될 것이다. 융의 말마따나 인생에 대해 작별을 고하지 못하는 노인은 인생을 포용할 수 없는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연약하고 병약하게 보인다.」
-「신화와 인생」의 들어가는 말, 다이엔 K 오스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