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래울 Aug 20. 2022

은퇴 후에 도착한 봄, 시작

은퇴일기 7

 다 큰 아들이 제방 컴퓨터 앞에서 킬킬캴캴하는 것을 기꺼워하고개 두 마리 꼬리 치는 걸 받아주고손주의 웃음을 자아내려 시큰대는 허리를 한 번 더 굽혀주고자연의 사이클에 맞춰 인간 존엄을 잃지 않으려는 노모의 안간힘에 주파수를 맞춰주고늙어가는 남편의 뻑뻑하고 수줍은 농담을 흙 묻기 전에 주워준다은퇴한 나의 선량한 인격 쪽의 일상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소풍 나가고 나 혼자 집을 보는 것 같은 볕 좋은 봄날이면 버들가지 비틀어 만든 구멍 없는 버들피리를 구성지게 불던 어머니 생각이 난다봄을 알리던 그 소리가 밭 둔덕에서 들리면 얼마나 슬프던지 왕 울어버리고 싶던 마음을 목울대 아리게 참고 들었다

 언젠가 월롱산 꼭대기에서 피리를 부는 데 갑자기 소풍 나온 사람들이 빙 둘러싸서 듣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던 저 버들피리 소리 꼭 녹음해 둬야지 하다가 어머니는 폐기능 검사도 잘 못하는 천식 환자가 됐다녹음을 못하는 대신 시로 끄적여 봤다가 시인 김이듬 선생님에게 슬픔만한 기억이 어디 있느냐버려서는 안 되는 기억이나 나만 겪었을 것 같은 고백을 밀고 나가라시는 온전히 나에게 올 때 내가 너에게 가겠다는 존재라서 안 되면 말지 식이면 시는 안 온다시는 전부를 걸기를 원하니 자기 부인 하지 말고 존재를 인정하고 곡진하게 써봐라쳐 내고 울며불며 언어에 매달리고 시와의 사랑에 빠져라.”라는 뜨거운 말씀을 들었다이후 다시는 선생님 근처에 얼씬하지도이 시를 꺼내 보지도 못했다.

 

다시 돌아온 봄     


녹슨 못어머니의 발꿈치는 그것을 관통했다 

위생병 출신의 남자가 매일 무심한 얼굴로 다녀갈 때마다 어머니는 출렁거렸다     

발이 저릴 때까지 버티던 재래식 화장실

길기도 긴 참외밭 고랑에 전정가위 던져버리고 

새벽기차를 타러 나가다 뒤돌아본 집엔 별이 곱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무표정한 아버지 담배연기만 기차역까지 따라 나오고

걸을 때마다 발뒤꿈치가 욱신거렸다  

   

쥐가 지나다니던 문간방 부엌에 햇살처럼 기어들어 만든 

사과 궤짝을 포갠 책상은 움직일 때마다 심하게 흔들거렸다 

그 겨울 안집 주인에게 얻은 외투는 

몇 년째 몸에 맞지 않아 

검은 곰팡이만 무성했다

그 사이에서 한참 동안 세월은 흐르지 않았다     


꿈속에서 자주 죽어 나갔던 어머니는 

봄만 되면 구멍 없이도 구성진 가락을 피워 올리는 버들피리로 소생했다

피안의 날갯짓으로 어머니를 덜어 나르던 구멍 없는 피리 소리

어려서 잃은 엄마를 찾아 어쩌면 저승으로 흘러 들었을까

빨려 들것 같아 들여다보지 못하던 깊은 우물 검은 두레박이 비브라토로 공명하였다


이제 할딱거리며 매년 조금씩 연착하는 봄 기차역에 내려 

그때 그곳에 둔 채 빠져나갔던 어머니의 어머니만큼 나이를 먹고 돌아와 보니

물기 가신 어머니 숨결로는 풀피리 가락을 뚫어낼 수 없네

반들거리는 버들가지 사이로 앙상한 쇳소리 바람이 불고

척추를 바로 세울 수 없는 마른 날숨으로 어느 것도 더는 부풀지 않네      

작가의 이전글 기억의 집에서 독거노인으로 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