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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래울 Aug 20. 2022

불임의 베란다

은퇴일기 8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 섬에서 자란다는 가시면류관 나무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사시장철 꽃대를 밀어 올린다봄부터 가을까지 핀다는 꽃의 생리를 거스르며 겨울에도 피던 꽃이 평생을 나비 한 마리 만나지 못해 수분(受粉)하지 못하는 정염의 선홍색을 고스란히 품은 채 말라 떨어져 있다어쩐지 처연하여 마른 꽃을 한 접시 소복이 주워 올려 영정 사진에 진혼곡이라도 깔아주려는 심정으로 보전하였다뻣센 가시로 예수님의 가시면류관을 만들었다는 이 나무의 꽃말은 고난의 깊이를 간직하다 라고 한다불임의 베란다에서 사철 이루어지는 고난의 깊이가 아프리카만큼 뜨겁고 목마를까 생각하는데 창밖으로 날아온 까치를 보고 중성이 된 개가 날아갈 듯이 짖는다어금니처럼 단호한 베란다의 이중창이 공원의 풍경을 물고 놓아주지 않는다


 베란다에서 귀를 세우고 정찰하던 개는 건너편에서 짖는 소리를 건조한 음성으로 맞받아 짖다가 즉각 제지당하고는 온 집안을 뱅글뱅글 돌아 이것저것을 물고 와 놀이 제안을 한다반응이 없으면 극적인 소재를 물고 와 눈 맞춤을 한 후 물고 도망을 가는데 그 선택 기준이 인간의 반응속도과 강도에 정확히 비례하여 플라스틱 옷걸이에서 개어놓은 속옷으로 신용카드로 옮겨 간다서툰 작전에 속아 넘어가주지 않을 때나 무관심을 견디기 힘들 때는 아주 분화된 낑얼거림으로 다양한 엄살을 피워 기어이 주인의 항복을 받아내고야 만다앞발을 들어 툭 치고는 이 귀여움 어쩔래하고 쳐다보다가 바쁜 척하는 주인이 도대체 언제 컴퓨터에서 눈을 떼 자기를 쳐다보는지 보겠다는 듯이 시선을 뒤통수에 고정시키고 엎드려 있다가 눈이 마주치면 내기 게임에서 이긴 승자 모드로 살랑거리며 다가오기도 한다대부분은 본래 거기가 고향인 듯 나른하고 밍밍하게 헛방을 날리거나 절실하지 않은 자세로 베란다에 누워 자신을 달랜다


 개들은 생리 중이 가임기라서 산책 중 공원에서 생리 중임을 눈치챈 다른 개의 날랜 접근에 낚시채에 낚이듯 튕겨져 들어온 중성화 수술 안 한 또 다른 늙은 암캐가 한쪽에서 중얼거리며 자고 있다발정기인 늙은 개는 밤에도 낮에도 제대로 잠을 못 이루고 몸을 동그랗게 말아 굴리며 더운 김을 조금씩 뱉어내고 있다촉촉한 코를 내두르며 예민한 감각에 제 손으로 상처를 내어 말리는 개에게 감각의 착란을 주문한다너의 전생과 후생은 이 베란다보다는 감미롭고 쾌락으로 충만하며 본능적인 생의 기쁨으로 아우성치기를부디 그러했기를.

 

 오랜만에 저녁 베란다에서 빗소리를 듣는다물속에서 흉터에 아가미가 돋아나던 영화 속 엘라이자처럼급기야 물속으로 사라지고만 엘라이자처럼다시는 마을로 돌아오지 않은 인디언 소년 빗속을 달려처럼 베란다에서 상처받은 외상들이 감각의 지느러미로 되살아나기를꽉 닫힌 창 안에서 빗물의 세상을 패러디하며 갇힌 몸의 괴로움들을 잘 풀어놓기를부디 언젠가는 이 메마른 생을 담보로 각자 고독하지만 자연스럽게 놓여나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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