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첫눈이 내리던 날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고학년까지 정말이지 부서질듯 작고 연약한 여자아이부터 또래보다 훨씬 덩치가 큰 고참에 속하는 남자아이까지 모두 희망보육원 위의 텃밭에 나와서 쪽파를 수확하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때 희망보육원 위에 옹기종기 모여사는 일반 민가 중에서도 제일 큰 집에서 기르던 로키라는 이름의 로트와일러가 갑자기 밭위를 마구 질주하며 미친듯이 좋아 날뛰었다.
재호는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한송이씩 내리던 첫눈이 어느새 함박눈이 되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맨손으로 쪽파를 수확하느라 부르튼 손을 호호불면서도 하얀 첫눈이 내리자 모두의 얼굴은 기쁨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재호는 다시 고개를 돌려서 얼마전에 새로 들어온 소연이라는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희망원에서 보았던 아이들과는 달리 피부가 유난히 하애서 창백해 보이고, 몸이 가녀려서 자기도 모르게 자꾸 눈길이 가는 아이였다. 그런 소연도 첫눈이 반가운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짝! 소연의 뺨을 찰지게 때리는 손이 있었다.
"지금 넋놓고 뭐하는 거야? 동해를 입기 전에 어서 오늘 할당량 채우도록 해!"
희망원에서 규율을 담당하는 김승환 과장이 소연을 본보기 삼아서 다른 아이들을 재촉했다. 첫눈이 내려서 한껏 들뜬 마음도 잠시 다른 아이들도 김승환 과장의 사나운 본보기용 손찌검에 가슴이 쪼그라들어서 또다시 고사리손을 놀려서 쪽파를 수확하기 시작했다.
재호는 속에서 소연을 향한 알수 없는 연민과 김승환 과장을 향해 부글거리는 분노를 애써 누르며 죄없는 쪽파에 대고 분풀이를 하면서 미친듯이 쪽파를 뿌리채 뽑아서 흙을 털어냈다.
쪽파 수확이 끝난 후 희망원 아이들은 일제히 손발을 씻고 저녁을 먹으려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단은 평소와 다를바 없이 소고기는 찾아볼 수 없는 말그대로 무우만 있는 무우국에 멸치볶음과 김치가 다였다. 아이들은 쪽파를 수확하느라 힘들었는지 그래도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재호는 저녁을 먹고 잠시 쉬는 동안에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게 누런 호랑이 그림이 그려진 조그마한 은색 약통을 소연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소연아! 많이 아파? 이거 바르면 금방 낫는데. 너 가져. 난 튼튼하니까 별로 필요 없어."
"고마워. 재호 오빠!"
소연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아까의 서러웠던 순간과 재호의 따듯한 마음이 오버랩되면서 불과 몇일 사이에 변한 자신의 처지에 대한 원망이 점철된 눈물이었다.
소연의 엄마는 재혼을 위해서 소연을 희망원에 맡기고 그렇게 소연을 떠나버렸다. 갑자기 고아가 되어서 희망원에 맡겨진 소연의 삶은 매일매일이 암울함 그 자체였지만, 세상은 그런 눈물조차 마음대로 허락하지 않았다. 아이가 어리다거나 조그맣다거나 연약하다는 것을 세상은 일일히 고려해주지 않는다. 동심! 그런 것보다는 희망원은 아이들의 관리, 더 정확하게는 통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희망원에 남아있는 아이들 중 최고참은 신태수였지만, 태수조차도 재호는 함부로 건들지 못했다. 재호의 카리스마와 근력을 인정해서 되도록 서로는 부딪히지 않는 선에서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주고 있었다. 태수가 나이도 한 살 많고, 키도 덩치도 훨씬 컸지만, 재호는 끝을 알 수 없는 깡다구와 다부진 체격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운동신경을 타고난 아이였다.
재호의 도움으로 소연은 희망원과 새로 다니게 된 초등학교 생활에 차츰 적응하면서 공부도 곧잘 했고, 곧 웃음도 되찾게 되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진해에 주둔중인 미군들이 선물을 잔뜩 싸들고 희망원을 방문했다. 아이들을 위해서 기타를 치고 노래도 부르고 게임도 하면서 아이들과 신나게 놀아주었다. 미군들은 떠나기 전에 아이들에게 희망원 바로 위의 민가에 사는 일반 가정집 아이들도 갖지 못하는 귀한 장난감과 초콜렛, 그리고 각종 스낵들을 선물로 주었다.
재호는 얕게 채를 쓴듯한 호박으로 만든 커다란 봉지에 든 스낵을 들고 희망원 위 민가에 살던 친구 준수를 찾아갔다. 둘은 같이 스낵을 맛있게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깔깔 웃어댔다. 하지만 어둠이 깔리면 둘의 처지는 극명하게 나뉘었다. 희망원으로 돌아가서 자야하는 재호와 부모님과 함께 잠을 자는 준수로.
재호는 잠이 오지 않으면 소연을 생각하면서 이런저런 상상을 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들어서 자신이 마치 동화속 주인공처럼 잘되어서 소연이와 행복하게 사는 꿈을 꾸었다. 꽤 피곤했는지 살짝 코를 골면서 행복하게 미소지으며 꿈을 꾸는 재호의 모습은 그 또래의 아이를 둔 부모라면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