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키다리 아저씨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자 희망원과 동산 초등학교의 경계에 있는 언덕 대나무밭에 새롭게 죽순이 올라오고 있었다. 소연도 회복 탄력성이 큰 어린 소녀인지라 재호의 도움으로 희망원에서의 생활에 적응해서 점점 미소를 띠는 모습이 잦아졌다.
그 무렵 언제부터인가 매주 토요일마다 미군부대에서 희망원을 방문해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 재호와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맺은 사람은 미국의 전형적인 카우보이 스타일에 프랭크, 멕시코계 미국인인 호세와 브라질 출신으로 미국으로 이민가서 미군에 입대한 로드리게스였다.
이들은 희망원 인근 동산교회의 영어예배부에 다니면서 교회 사람들과 함께 고아원 사역의 일환으로 희망원을 방문하기 시작한 것이 매주 방문하여 아이들과 한나절 놀아주고 저녁이 되면 돌아가는 것이 루틴처럼 되었다. 특이한 점은 프랭크, 호세, 로드리게스는 아이들과 놀아주다 자기들이 잘하는 몇 가지를 시험 삼아 알려주곤 했는데, 프랭크는 레슬링을, 호세는 권투를, 그리고 로드리게스는 그 당시 한국에는 생소한 주짓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냥 놀이차원에서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는데, 재호는 이들이 뭔가 하나씩 알려줄 때마다 눈빛이 번뜩였고 마치 스펀지처럼 이들이 알려주는 동작들을 흡수했고, 프랭크를 비롯해서 세 사람은 재호의 천재적인 움직임에 입이 쩍 벌어졌다.
재호는 소연이 외에도 매일 보고싶어서 미칠 지경인 세 사람이 생긴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재호는 삶에 열정이라는 걸 갖게되었다. 그래서 토요일이 되기전까지 그 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그들이 알려준 동작들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벚꽃이 만발한 어느 토요일, 한참 군항제로 진해는 전국에서 몰려든 관광객들과 다양한 퍼레이드 및 장터로 축제 분위기였다. 이날은 고아원을 방문한 사람들이 원장님의 허락으로 같이 군항제를 구경하러 갔다. 이 당시 행사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서커스와 약장수의 차력 쇼였다.
공설운동장 입구쪽에 마련된 서커스에서 거대한 코끼리를 직접 만져보고 먹이를 주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투견대회에서 사나운 도사견들의 투견도 구경한 다음, 재호와 프랭크 일행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약장수의 차력 쇼를 구경하러 갔다.
약을 팔기 위해서 차돌을 맨손으로 깨는 당수도와 입으로 불을 뿜어대는 불 쇼에 이어서 그날은 자동차가 지나가도 손이 전혀 다치지 않는다면서 누가 직접 경험해보고 싶은 사람이 없는지 사회를 보던 약장수가 지원자를 구했다. 재호가 손을 번쩍 들자 희망원 아이들을 군항제에 데려간 교인들이 극구 만류했으나, 프랭크 등이 괜찬을 거라고 재호의 편을 들어서 결국 재호가 봉고차 바퀴 앞쪽에 손바닥을 대자 운전사가 시동을 걸고는 자동차 바퀴가 재호의 손바닥 앞뒤로 몇 번 지나가게 했다. 그리고는 재호에게 손이 어떠냐고 물어봤다.
"멀쩡해요. 하나도 안 아파요."
"자, 여러분! 들으셨죠? 이 약을 먹으면 통증이 싹 사라지고 하나도 안 아픕니다. 단돈 1000원에 팔아요. 물량이 얼마 없으니 빨리 손드시고 먼저 가져 가는게 임자입니다."
약장수는 박수갈채를 유도하며 사람들에게 본격적으로 팔아야 될 약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사물놀이패들이 온갖 모양의 화려한 탈을 쓴 채 신나게 꾕과리, 북, 장구와 징을 치면서 놀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당시로는 신기한 장난감과 인형들을 팔고 있었다.
재호와 소연은 희망원에 온 이후로 가장 신나게 하루를 보냈다. 가로수길마다 화사하게 피어있는 화려한 연분홍빛의 벚꽃들이 군항제라는 축제의 배경이 되고, 서커스, 투견, 약장수, 퍼레이드, 장난감과 음식 상인들이 그림의 곳곳을 차지하던 축제의 절정이 끝나면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이 빠져나가서 쓸쓸함만이 남는 법인데, 이날 재호와 소연은 희망원에 돌아와서도 그날의 흥분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재호는 프랭크가 사준 장남감을 손에 꼭 쥔 채 잠이 들었다.
세월은 야속하게도 빠르게 흘러갔고, 대나무 죽순이 자라듯이 희망원 아이들도 점점 몸과 마음이 빠르게 성장했다. 그 사이 어린아이들 위주로 새로운 가정에 입양되어 희망원을 하나둘씩 떠나갔고, 또 새로운 아이들이 들어왔다.
재호는 동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진해남중학교에 소연은 진해여자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그러는 사이 프랭크는 한국에서의 순환근무를 마치고 아프가니스탄으로 파견되었다. 호세와 로드리게스는 여전히 토요일마다 희망원을 방문해서 재호에게 권투와 주짓수를 가르쳐주었다.
"재호는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모르겠어요. 아저씨들 같은 사람요."
"노노노, 재호! 한국에서는 나이차가 좀 나면 아저씨라고 하는 모양인데, 우린 아직 장가도 안갔어. 그러니까 형이라고 해. 오케이?"
"오케이. 형!"
그날 재호에게 형이 두 명 생긴 날이었다. 정확하게는 아프가니스탄으로 파병간 프랭크까지 세 명의 형이 생긴 것이었다.
"근데, 왜 우리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멋있잖아요."
"군인이라서?"
"아뇨.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줄 만큼 힘이 있고 또 친절하잖아요. 전 꼭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오호! 재호 멋진데! 그래 재호는 반드시 그런 사람이 될 거야. 그건 내가 보증하지."
"나도 보증할게."
"하 하하하!"
그러는 사이 지난 몇십 년간 헌신적으로 고아들을 돌아보며 희망보육원을 일반 가정집 못지 않게, 아니 어찌보면 그 이상으로 따듯하게 보듬어주었던 이연옥 원장님이 나이가 들어 차츰 치매증상이 나타나자, 희망원에서 자랐고 커서도 희망원에 말뚝을 박은 김승환 과장이 희망원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