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 고등학교에서 보낸 첫 달

예고를 포기하고 3년 동안 바라던 학교에서

by 계란마리


#면접


지난해 12월 큰일 아닌 큰일이 났다.

내 앞머리가 처참하게 희생당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면접용 앞머리로 변신했다.

누군가 갉아먹은 것 같은데 분명 같은 화분에서 자란 애들끼리 뜨는 정도는 다르고 쫙 펴서 늘어뜨려도 눈썹이 훤하게 보이는, 착하다 못해 순진하다 못해 호구처럼 보였다, 사람이.

선생님들은 ‘앞머리 귀엽게 잘랐네’라고 하시며 놀라운 속도로 충격을 숨기셨고, 단짝 친구는 너무 좋아하더니 내 이름을 ‘앞머리’로 개명해 버렸다.

우리집 칠판에 아빠가 적어준 면접용 아카이브. 난 와중에 졸라맨이 귀여워서 감탄만 하고 있었다.

국제변호사라는 면접용 직업을 품에 안고 면접을 보러 갔다. 중학교 3년 내내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생활기록부에 남겨진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지금 꿈은 외교관이다. 오랫동안 공부하기 싫다.


앞머리 포함 그동안 면접을 위한 공부나 연습은 보상을 받았다. 합격했다.



#3월


입학식 당일부터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바리바리 싸들고 온 과일통을 냉장고에 넣고, 원서로 책장을 채우고, 화장실에는 칫솔을 걸었다. 짐 푸는 내내 엄마랑 아빠가 보고 싶었다. 중학교 때 친구들도 보고 싶었다. 동생들을 눈앞에서 제거했다는 것 말고는 이득을 본 기분은 아니었다.


우리학교는 태권도 한다. 태권도 때문에 인생이 힘들다.

태권도가 세상에서 제일 싫다. 입학 전에는 매력 있다고 생각했는데 6시 반에 눈을 떠서 끌려가듯 기숙사를 나오고 운동하는 게 너무 싫다. 그렇다고 운동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벌점을 받고 기숙사 로비에 이름이 전시되는 것보단 나으니 열심히 일어나기는 한다.


자치부. 기숙사에서 일하는 학생회. 맹구랑 유리 내가 한거다. 짝짝


학생회에 지원해서 붙었다. 룸메이트가 이 부서 차장이라 같이 해보고 싶었다. 자치부는 매주 목요일 밤 기숙사 방을 돌아다니면서 청소상태를 검사한다. 나름 재미있다.


생물 코티칭.


원어민 선생님과 배우는 과목 중 하나, 생물이다. 생물 원어민 선생님은 라디오헤드 팬이셔서 전부터 내가 좋아하던 분이다. 라디오헤드 좋아하는 사람=내가 좋아하는 사람.

과학을 좋아하진 않는데(수학만큼 싫진 않다. 수학 죽어.) 영어랑 같이 하니까 할만했다. 선생님들이 다 놀랍도록 잘 가르치셔서 감동받았다.


1인1기 시간. 내가 짱먹었다.


1인 1기 수업으로 바이올린 고급에 들었다.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악기 연주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설렜다. 10월쯤에 1인 1기 발표가 있어서 벌써부터 준비했다. 곡이 생각보다 너무 쉬웠다. 그래서 선생님이 개인연습 시간을 주시면 나는 그 틈에서 비에니아프스키나 사라사테를 연습했다. 내심 아무한테도 들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여기서도 예고 얘기를 종종 들었다. 왜 예고 안 가고 여기 왔냐고. 근데 이젠 그냥 아무렇지 않게 평생 할 자신이 없었다고 말한다. 오히려 취미로 하면 평생 하겠다고.


2년을 레슨을 안 받고 지난 네 달 동안은 바이올린에 손도 안 댔는데 실력은 하나도 안 죽었다. 이것도 신기하다.


내 최애과목 스페인어.


고등학교에 오고 스페인어에 푹 빠졌다. 스페인어가 제일 재미있다. 중학교 2학년 때 축구를 보기 시작하면서 통역 없이 라리가의 해설을 알아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만 해 본 적은 있었다. 스페인어는 나한테 휴식이자 공부가 되었다. 고등학생 내내 스페인어 열심히 하고 성인이 되면 언어 두 개 정도 더 배우고 싶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게 제일 즐겁다.



역대급이자 처음인 비극적 생일.


3월 모의고사 전날이 생일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난다. 그래도 룸메가 생일파티 해줬다. 그것 말고는 비극이었다. 수학 문제가 안 풀려서 열심히 울었다. 특별한 날처럼 안 느껴졌다.

그 와중에 다음날에 수학 폭망했다. 사람 점수가 아니었다. 저 때 나한테 할 수 있는 욕이란 욕은 다 갖다 박았던 것 같은데 잘했다고 생각한다. 뭘 얼마나 멍청해야 가능한 건지.


3모 망한 게 3월의 엔딩이지만 아침 태권도에 힘든 학교 수업, 야자를 견뎌가면서 한 달을 마무리한 거에 대해 칭찬이나 하겠다. 내 딴에는 그게 진짜 중요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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