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것을 가져도 왜 마음 한켠이 공허할까
중세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떤 존재인가이다.”
직업이나 타이틀이 아니라, 행동하는 나 자신의 상태가 삶을 규정한다는 말이다.
에리히 프롬은 여기에다가 또 하나의 구분을 덧붙인다.
쾌락과 기쁨. 쾌락은 소유의 언어다.
잠깐의 만족 뒤에 더 강한 자극을 요구한다.
쾌락의 도파민이 지속적인 자극을 통해 더 강한 것을 끌어 당기는 것이다.
하지만 기쁨은 존재의 언어다.
깊고, 오래가며, 삶 전체를 지탱해주는 기둥역활을 해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이렇게 소유의 굴레 안에서만 살아야 할까.
프롬의 대답은 분명하다.
이 길은 의식적으로 선택된 결과일 뿐이라고.
소유와 존재,
두 가지 가능성은 언제나 우리 앞에 있다.
어느 가치를 더 중요하게 두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
프롬이 말한 새로운 인간은 모든 것을 버린 무소유자가 아니다.
물건을 갖되, 그 물건에 나의 정체성을 맡기지 않는 사람.
소유보다 관계의 깊이를 선택하는 인간을 말한다.
들썩이는 강남의 부동산 소식을 들으며, 서울 자가에 대기업 김부장 김낙수가 떠올린다.
서울에 자가가 있고, 대기업에 다니며, 남들이 보기엔 충분히 열심히 살아온 사람.
그런데도 그는 늘 불안하다.
이미 많은 것을 가졌는데도, 마음 한편이 계속 공허해져 간다.
왜일까. 왜.
그의 삶은 끊임없이 자신을 존재를 증명해 줄 소유물을 요구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집, 직함, 연봉, 성과.
더 많이 가져야만 괜찮은 사람이 되는 구조.
그 구조 안에서는 잠시도 안심할 수가 없다.
만일 그가 이 책을 읽었더라면 혹시 달라졌을까?
『소유냐 존재냐』
프롬은 말한다.
정체성을 바깥의 것에 기대는 순간, 인간은 끝없는 욕망의 굴레에 갇힌다고.
더 갖지 않으면 불안하고, 갖고 나면 곧 잃을까 두려워지는 삶.
소유는 안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불안을 연장시키는 방식이라고
하지만 이 지점에서 다른 가능성도 제시한다.
바로 존재 양식이다.
존재란, 세상과 어떻게 관계 맺는가의 문제다.
경험하고, 연결되고, 창조적으로 활동하는 방식.
무엇을 소유했는지가 아니라, 무엇이 나를 통과해 가는가에 있다.
존재의 삶에 대해 프롬은 이야기 한다.
나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자유로움과 감각,
타인과의 관계가 나를 통과해 간다는 것이다.
관계에서 소유의 관계는 통제와 집착으로 흐른다.
상대를 관리하려 하고, 내 기준에 맞추려 한다.
존재의 관계는 다르다.
관심을 갖고, 반응해 주고, 사랑한다.
그리고 그 관계의 흐름에서의 활동 그 자체에 머문다.
이 차이가 관계의 질을 완전히 바꾼다.
만일 김낙수 부장이 이런 깨달음을 얻었더라면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존재를 증명해 줄 소유물을 요구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