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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마다 살아 숨 쉬는 문화 유산 이야기

“우리는 남의 것을 흠모하느라 자신의 것을 잊고 지냈다” - 유홍준

by 마이진e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걷는다는 건,

단지 발을 옮기는 일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새삼스레 유홍준 작가님의

문장을 통해 배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펼치는 순간,

나는 이미 길 위에 서 있었다.


시간을 건너는 길.

잊혔으나 여전히 살아 있는

그 길 위에서 작가 유홍준은 말을 아끼고,

시선을 길게 둔다.


경주의 석굴암 앞에 선 그는,

단지 불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불심이 깃든 공간을 마주한다.


그 정교한 조각 하나하나가

단지 돌이 아니라,

천년 전 장인의 숨결이라고 알려준다.


감탄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저런 대칭과 비례가 가능했을까.


인공과 자연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그 안에서 불국토.

실제로 존재했음을 믿게 된다.


그는 바라본다.

기술이 아닌 철학을

그 깊이를 알게 되면,

석굴암은 더 이상 관광지가 아니다.


그것은 기도일 수도, 그리움일 수도,

위대한 ‘손’에 대한 선조들의 역사다.


부석사의 무량수전.

그는 그곳에 이르면 늘 햇살을 먼저 말한다.


부드러운 나무 기둥, 기울어진 듯

곧은 처마 끝 걸린 햇살 한 조각.


‘뜨지 않는 돌’ 위에 지어진 절.

부석은 떠 있다.


세속에서 한 뼘쯤 뜬 곳에서 그는 조용히 말한다.

“여기엔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사랑한 사람들이 있다”라고.


무량수전 앞마당에선, 뿌연 안갯속에서도 단정한 기둥들이

여전히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그 기다림 앞에 선 우리는 잠시 말을 줄이고,

숨을 낮추어 가며 찬찬히 바라본다.


아름다움이란 그저 화려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견디는 선함이라는 걸, 그곳에서 깨닫게 된다.


공주의 마애삼존불상

발걸음을 멈추어 본다.

수묵화처럼 바위에 새겨진 부처의 얼굴.

그 미소는 역설적이다.


이미 풍화되었지만, 그래서 더 부드럽고 인자하다.

거대한 자연에 살짝 기대듯 새겨진

불상의 표정에서 그는 백제인의 미적감각과 품격을 읽는다.

당시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까지도.


그리고 무령왕릉.

돌을 들춰낸 공간에서 맞이한 기적 같은 발견.

무덤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왕과 왕비는

화려함보다 절제된 단아함으로 남았다.

벽돌 하나, 벽화의 색감 하나까지


그는 하나하나 뜯어보며

“이것이 진짜 고대의 디자인이다”라고 말한다.

그 디테일은 단순한 유산이 아니라

세대를 넘어 이어진 안목의 증거였다.


작가는 단지 유적을 나열하지 많은 않는다.

문화유산의 생생함을 읽는 태도를 가르친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의 말은 지식을 넘어선 존중의 방식이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남의 것을 흠모하느라 자신의 것을 잊고 지냈다”라고.


그래서 그는 걷고, 기록하고, 말한다.

다시 ‘우리 것’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의 시선을 따라가며 따뜻함이 올라온다.

무언가를 애써 미화하지도 않고, 폄하하지도 않는다.

그저 오래된 것을 오래 바라볼 줄 아는 사람.

그 마음이 책장마다 스며들어 있다.

숨겨진 아름다움을 꺼내는 손길처럼.


책장을 덮고 나면, 그저 돌로만 보이던 것들이 다르게 보인다.

절집의 단청 하나, 부처의 미소, 기와지붕의 곡선까지도

모두 어떤 이의 간절함으로 만들어졌음을


그 모든 건

“기억되고 싶어 기다리는 것들”이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땅에는 아직도 보이기를 기다리는 이야기들이 많다고.

그리고 이제, 그 이야기에 나의 발걸음을 얹어 책과 함께 걷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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