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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엄마의 장롱이 점점 비워져 간다.

by 마이진e

나이가 들수록 누군가를 이해하는 혜안이 생긴다.


어릴 때는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고,

한때 이상하게만 여겨졌던 행동이 이제는 깊은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특히, 인생을 정리하는 시간이 다가온다는 엄마의 삶을 이해하는 순간들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온다.


엄마는 언제나 치열하게 살아왔다.

가족을 위해 아낌없이 희생하며 하루하루를 채워왔다.

우리는 늘 그 속에서 엄마가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줄로만 알았다.


그런 엄마가 요즘 들어 주변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옷장 속에 가득했던 옷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점점 공간이 비어 간다.


아끼고 아끼던 코트도 어느 날엔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엄마가 소중히 여기던 물건들이 하나둘 사라져 가고 있다.


예전에는 쉽게 버리지 않던 물건들도 이제는 망설임 없이 정리하신다.


한 번은 엄마가 옷을 정리하며 내게 말했다.


"이제 나한테는 이렇게 많은 옷이 필요 없을 것 같아.

그냥 편한 몇 벌이면 되지. 우리 딸이 이걸 입을 수 있을까?"


사실 엄마와 나는 체형이 많이 달라 옷을 공유하기 쉽지 않다.

팔과 다리가 긴 나에게 엄마의 짧은 소맷부리는 썩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엄마의 옷을 받아들이곤 한다.

입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단순한 정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엄마는 자신의 삶을 가볍게 정리하며, 마지막을 향해가는 준비를 하고 계신 것이었다.


엄마의 장롱 정리는 단순한 정리정돈이 아니다.

남겨질 딸이 번거롭지 않도록,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배려였다.

미리미리 조금씩 비워내며 삶을 되돌아보는, 나름의 성찰의 시간이기도 했다.


우리는 흔히 죽음을 피하고 싶은 주제로 여긴다. 하지만 엄마는 달랐다.

엄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것을 담담하게 준비해 나가셨다.


새하얀 백발이 성성해지고, 기운이 없어질 때면 혼자서 목욕조차 힘들어하시는 모습.

어릴 때는 볼 수 없었던, 초로의 엄마 모습이 이제는 눈앞에 있다.


엄마의 장롱이 비어 가는 것을 보며 깨닫는다.

오래된 물건을 하나씩 버리는 것은 단순한 정리가 아니라,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고, 언젠가 닥쳐올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최근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 를 읽어 가고 있다.

책 속의 상황들이 엄마의 현재 모습과 오버랩이 되는 것 같아 애잔한 마음이 스며든다.


"혹시라도 내가 없으면 이거, 네가 챙겨." 엄마가 가끔 하시던 이런 말들이 이제는

새삼스럽게 그 무게를 실감케 한다.


2~3년 전만 해도 그런 말을 들으면 굉장히 불편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이 엄마의 담담한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엄마는 가족들이 갑작스러운 이별에 당황하지 않도록, 지금부터 현실적인 준비를 하고 계셨다.

남겨질 자식들에게 마지막까지 배려를 하고 계신 것이다.


과거에는 이해할 수 없던 것들이 이제는 하나둘씩 이해된다.

젊었을 때는 죽음이라는 단어 자체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 역시도 이 주제와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실감해간다.


아버지가 투병 끝에 돌아가신 지도 어느덧 10년이 되어간다.

아버지의 부재 이후, 나이가 들수록 삶과 죽음이 하나의 과정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엄마가 보여주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태도는 나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그렇게 하나둘씩, 이해할 수 있게 되어 간다.

엄마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내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엄마가 준비하는 삶의 정리는 남은 시간들을 더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엄마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조금씩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많이 이해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세월을 지나왔다는 하나의 방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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