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침묵 사이 경계에서 배운 삶의 태도
그 사이에서 태어나다.
나는 말이 많은 사람과
말이 너무 없는 사람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늘 침묵 속에 계셨다.
입을 열어 무언가를 설명하기보다는,
그저 묵묵히 몸으로 보여 주시기만 하셨다.
삐걱대는 문을 고치고,
아무 말 없이 무심하게 행동하시는 분
가끔은 아버지가 날 사랑을 하기는 할까?
라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있다.
반면 어머니는
하루의 시작부터 끝까지 말을 풀고 사셨다.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이야기들,
아침 뉴스부터 시장통 이야기까지
다른 이의 일상까지 여러 가지 이야기들
언제나 세상의 소리를 들려주셨다.
어디가 아픈지, 누구랑 다퉜는지,
좋았던 말, 서운했던 말,
모든 감정이 말이 되어 떠다녔다.
나는 그 둘 사이에서 자랐다.
말이 넘치기도 했고,
텅 비어있기도 한 집 안에서
나는 스스로 균형이라는 것을 배워야 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나 역시 아버지와 같은 종이였기에
어릴 땐 몰랐다.
왜 나는 이토록 말이 조심스러운지.
왜 어떤 말은 마음속에서만 맴돌다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지.
친구들 사이에서는 수다스러웠고,
낯선 사람 앞에서는 조용했다.
어른들 앞에서는 생각을 삼켰고,
혼자 있을 때는
그 하고픈 말들을 조용히 노트에 적었다.
그렇게 나는
'조용한 듯 의외로 말 많은 사람'이 되었다.
겉으론 잔잔한 물결이었지만,
속은 늘 웅성웅성 거린다.
한 문장을 꺼내기까지
수십 번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
내가 꺼낸 말이 파급에 대해
너무 많은 고민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 나는, 종종
침묵하는 사람의 마음을 먼저 알아챘고
수다스러운 사람의 말속 슬픔도 읽었다.
왜냐하면 나는,
두 사람 모두의 자식이었으니까.
한쪽으로 기울지 않으려
늘 중심을 잡으려 애썼지만,
그 중심은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
하루는 말 쪽으로,
다른 하루는 침묵 쪽으로
마음이 흔들리곤 했다.
그건 중심이 아니라,
경계선에 있었다는걸.
말과 침묵 사이. 그 경계 위에서
나는 말의 무게를 배우고,
침묵의 용기를 배웠다.
어떤 날은 말이 필요하고,
어떤 날은 말이 없어야 하니까.
말을 하는 것도 용기지만,
하지 않는 것도 현명한 지혜라는 걸
커가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말이 많은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고,
말이 없는 사람에게는
먼저 건네는 다정한 한 문장이 필요하다.
나는 그 둘의 자식으로
어느 쪽에도 머무르지 않게,
그러나 늘 마음은 기울인 채
살아왔다.
지금은 말로 풀어가는 분 옆에서
때론 동일한 이야기의 반복이 너무 힘들어서
도망가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럴 땐,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립기만 하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이런 사람이 되어 간다.
“말의 깊이를 아는 사람이고,
침묵의 결을 이해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