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봄날이었다.
거리에는 연분홍 벚꽃잎이 흩날리고, 사람들은 밝은 옷차림으로 분주히 오갔다. 몇 년간 앞만 보며 달려온 내 삶도 겉보기에는 이제 안정된 듯 보였다.
치열하게 일한 끝에 자리를 잡았고,
생활은 어느덧 일정한 궤도에 오른 상태였다.
그러나 화창한 계절과는 대조적으로, 내 마음
한구석은 이상할 만큼 고요하고 허전했다.
얼마 전 가족들과 함께 다녀온 하와이 여행의 기억이 아련하게 남아 있었다. 오랜만에 가족이라는 섬에 발을 디뎠던 그 시간들은 내게 큰 위안과 행복을 주었다. 웃음과 온기가 가득했던 며칠간의 여행을 끝내고
홀로 서울의 일상으로 돌아온 순간,
나는 빈집의 정적과 마주해야 했다.
가족과 함께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공허함이 내 생활 구석구석에서 조용히 배어 나왔다.
사회적으로는 안정되었을지 몰라도,
정작 내 내면은 메마른 땅처럼 갈라져 있었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일에만 매달린 채 스스로를 얼마나 고립시켜 왔는지.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며 목표와 실적에만 신경 쓰다 보니, 정작 내 감정은 돌볼 겨를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가족들과 보낸 하와이의 며칠은 그 사실을 일깨워 주는 사건이었다.
사람 사이의 온기가 이렇게 소중한 것이었나
새삼 느꼈지만, 정작 내 곁에는 함께할 이가 없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연일 몰려오는 적막 속에서,
나는 이제 삶에 작은 균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텅 빈 마음 한켠을 따스하게 채워줄 무언가, 외로운일상에 새로운 리듬을 더해줄 무언가가 간절했다.
그 ‘무언가’는 사람일 수도, 새로운 취미일 수도 있었다하지만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의외로 작은생명이었다. 혼자만의 공간에 조용히 스며들어 나와 함께 숨을 나눌 존재.
왠지 고양이가 딱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특별히 활달한 동물보다는 나처럼 차분한 성격의 반려묘라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이내 인터넷으로 고양이 입양 관련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 입양 사이트에서
새 주인을 기다리는 하얀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사진 속 작은 고양이는 포근한 흰 털에 맑은 눈망울을 지니고 있었다. 소개글에는 그 스코티시 폴드 여아
라고 적혀 있었다. 스크린 너머로 마주한 눈빛이
이상하리만치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당일 저녁, 고양이를 보러 갔다.
주소지로 찾아가는 길 내내 심장이 두근거렸다.
설렘과 긴장, 그리고 작은 두려움이 뒤섞여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새로운 인연이 내 삶에 들어오는 순간을 나는 제대로 맞이할 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조용히 물었다.
이윽고 도착하여 문이 열리고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서자, 따뜻한 공기 속에 은은한 사료 냄새와 함께 몇 마리의 고양이 울음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우리 안에서 새하얀 아기 고양이 한 마리가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처음 마주한 고양이의 모습은 생각보다도
작고 어렸고 큰 눈을 깜빡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살짝 겁을 먹은 듯하면서도 호기심이 어린 맑은 눈빛이었다.
나는 두 손을 모아 조심스럽게 고양이를 품에 안았다.
작은 체온이 내 가슴께로 전해졌다. 솜털 같은 흰 털은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러워 손끝에서 사르르 미끄러졌다. 고양이는 잠시 긴장한 듯 몸을 웅크리더니 이내
내 품속에서 자세를 잡고 앉았다.
그 순간 내 품 안에서 “야옹” 하고 작게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인사를 건네는 듯한 그 소리에 몇 달, 아니 몇 년 동안 굳어 있던 내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너무 귀여워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렇게 작은 존재가 내 품 안에서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일에 치여 무뎌졌던
감정들이 순식간에 깨어나는 듯했다.
나는 이 작은 생명이 내게 이렇게 큰 울림을 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날 나는 고양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고양이를 데리고 집에 돌아온 첫날 밤,
내 조용했던 방 안에는 전에 없던 온기가 감돌았다.
평소 퇴근 후에는 텅 빈 채 적막만 감돌던 공간이었지만, 그날은 달랐다.
낯선 공간에 내려놓자 고양이는 겁먹은 걸음으로 내 곁을 떠나 방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구석구석 냄새를 맡고 조심스레 움직이는 작은 발걸음소리가 바닥에 살짝씩 울렸다.
마치 우리 집이 원래부터 자기 집이었던 것처럼,
고양이는 금세 소파 밑과 식탁 아래를
탐험하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문득 미소짓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늘 혼자 지내던 내 공간에 새로운
숨결과 소리가 깃들기 시작한 것이다.
고요한 집 안에 퍼지는 사료 씹는 소리, 장난감 방울 소리, 그리고 가끔씩 들리는 고양이의 작은 울음은
이전엔 없던 생활의 음표처럼 느껴졌다.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잠자리에 들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가늘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곁에 있었다.
눈을 뜨니 고양이가 내 침대 옆 바닥에 몸을 동그랗게 만 채 잠들어 있었다. 그 조그마한 옆모습을 내려다보며, 내 마음 한구석도 따라 조용히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적막만이 가득했던 이전의 방이 아니었다. 이 작은 생명이 내 옆에서 숨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집안의 공기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물론 모든 것이 순식간에 극적으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히, 내 일상은 조금씩 새로운 빛을 띠기시작했다. 아침이면 늘 휴대폰 알람 소리에 억지로
눈을 떴던 내가, 이제는 창가에서 들려오는 고양이의 첫 울음소리에 자연스레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다. 늦잠을 자던 주말에도, 나는 일찍 눈을 떠 밥 달라는 듯 내 다리를 툭툭 건드리는 고양이를 웃으며 맞이했다.
퇴근 후 불을 켰을 때의 적막함도 사라졌다.
대신 문을 열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작은 존재를 떠올리며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렇게 사소해 보이는 변화들이 모여 내 삶을 조용히 바꾸어놓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제 집이라는 공간이 더 이상 쓸쓸함의
동의어가 아니게 되었다. 내 곁에 고양이가 있다는
사실이 하루의 끝을 견디게 해주는 작지만 확실한
위안이 되었다.
아직은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툴렀지만, 고양이와
함께하는 새로운 일상은 분명히 시작되고 있었다.
내 고요했던 호수 같은 삶에 잔잔한 물결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정작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 작은 물결들이 앞으로 어떤 큰 파도로 이어져
내 하루를 바꾸어 놓을지, 그리고 그 속에서 고양이와
나의 유대감이 얼마나 깊어져 갈지를.
따뜻한 봄날, 고양이는 그렇게 내 삶 속으로 들어왔다. 그의 조용한 숨결은 허전했던 내 마음을 채워주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어쩌면,
진짜 변화는 이제부터 시작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