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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원 Mar 16. 2020

2020 '스페이싱' 오딧세이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가 나온 지 52년이 됐다. 영화 제목의 연도인 2001년에서도 19년이 지났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는 시간의 테스트를 견뎌냈고, 최고의 영화를 얘기할 때 항상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명작이 됐다.

 이 작품의 위대한 점은, 당시 B급 장르였던 ‘SF 장르’로 인류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아우르는 대작 주류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주라는 미지의 장소를 통해(영화가 개봉한 1968년은 달 착륙 1년 전이다), 60년대 사회상과 시대정신을 놓치지 않고 나타냈다. 사회적, 경제적으로 끊임없이 발전을 거듭하며 팽창하던 시대. 또 과학의 발전으로 달로, 우주로 인류가 나아갔던 장밋빛 시대. 물론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기계인 ‘HAL9000’ 에게 죽을 뻔하기도 해서, 꼭 장밋빛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계속 발전할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으로 가득했던 1960년대 모습이 영화에 잘 반영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2001년에서도 19년이 지난 지금. 52년간의 길었던 스페이스를 향한 오딧세이(=경험이 가득한 긴 여정)도 2020년에서 그 끝이 보인다. 이제 더 이상 달로 사람을 보내지 않는다. 지구는 심해를 빼고 거의 모든 지역 탐험이 끝났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지구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 방법밖에 없다. 새로운 스페이스를 찾는 시대는 저물고, 이젠 스페이싱(공간 창출)의 시대인 것이다.




'농구 좋아하세요?'

 내가 고등학생일 땐, '슬램덩크'에서 강백호가 좋아하던 소연이 같은 여자 친구는 없었지만. 농구를 많이 했다. 처음에 할 때는 농구가 좋아서 한 것은 아니었다. 축구를 더 좋아했다. 하지만 축구부가 운동장을 썼기에 축구는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운동을 하고 싶었고 그래서 좁은 공간에서 여러 명이 할 수 있는 농구를 했다. 이것도 내가 학교에서 행한 일종의 스페이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좁디좁은 공간에서 하는 농구야말로 스페이싱이 중요하다. 농구 코트는 축구장에 비해 약 3.5배 작다. 농구는 10명이 뛴다. 축구는 22명이 뛴다. 키퍼 빼면 20명이니 두 배다. 경기장은 약 3.5배 작은데, 선수 숫자는 2배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길게 설명했는데, 결론은 농구는 좁은 공간에 사람이 많아 복잡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농구는 스페이싱이 매우 중요하다.

 '상대팀 보다 골을 많이 넣어야 이긴다.' 라는 구기종목의 대명제는 농구 또한 같다. 골을 많이 넣으려면? 일단 '슛'을 쏴야 한다. 농구에서 공격이 시작되면 상대편 코트 한쪽으로 총 10명이 모인다. 공간을 만들어주지 않는다면 골은 커녕 제대로 슛 한 번 쏘기 조차 힘들다. 그래서 선수들은 서로에게 스크린을 걸어주거나 더 좋은 위치에 있는 선수에게 패스하거나 상대 수비를 다른 쪽으로 유인한다. 공을 가진 선수가 슛을 쏠 작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




 내 경우엔 스페이스와 스페이싱을 원룸과 미니멀리즘으로 말할 수 있다.

 어렸을 적 나는 온전히 내 방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아주 어릴 때는 안방과 거실로만 된 집에서 방이랄 게 없이 살았다. 초등학교 때 아파트로 이사해서 방을 가졌지만 방을 할머니와 같이 썼다. 그러다 가세가 기울어 더 작은 방에서 형과 방을 같이 썼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 4인실 기숙사를 살았다. 마침내 처음 내 방을 가져본 것은 대학교 2학년 때 2평짜리 고시원이었다. 그 후, 서울로 자취하며 살게 된 반지하. 그리고 지금의 원룸 까지.

 고시원, 반지하, 원룸. 내가 살아본 공간 형태는 모두 원룸이었다. 원룸에 장점도 몇 있지만, 아주 큰 단점이 있다. 방 하나가 곧 주방이고, 안방이고 거실이라는 점이다. 방 하나에서 의식주가 전부 해결된다. 그렇다 보니 필연적으로 무언가 하나를 할 때, 공간을 만들고, 또 다른 하나를 할 때, 다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이렇다 보니 나도 모르는 새 나는 미니멀리즘을 지향하게 됐다. 미니멀리즘은 누군가에겐 지나버린 유행이지만, 내겐 불가피한 생존 방식이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니멀리즘이라는 말은 내게 기만적이며, 상업적이며, 아이러니하다. 인간이 정말 미니멀해질 수 있을까? 미니멀해질 수 있다면 어디까지 미니멀해질 수 있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였던 '르 꼬르뷔지에'는 말년에 4평 집에 거주하다 생을 마감했다. 유명 건축가였던 그가 4평 집에서 살다 생을 마감했다는 것의 의미는 분명하다. '한 사람이 살아가는데 많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 이런 그의 철학은 분명 너무 멋지다. 하지만 고시원이 보통 2~2.5평인데, 4평에서 살려면 미니멀 한 라이프스타일과 함께 개인 창고가 따로 필요할 것 같다. 4평 집에 살면서 개인 창고를 빌린다? 비효율적이며 비용적으로도 현실성이 적어 보인다.




 스페이스를 찾아 떠나던 장밋빛 시대는 끝났다. 이제 여기서 스페이싱을 해야 한다. 그래야 슛을 쏠 수 있고, 골을 넣을 수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스크린을 해줘야 한다. 서로가 더 좋은 위치에 선수에게 패스하고, 서로가 상대 수비를 달고 빠져줘야 한다.


 나는 이 스페이싱을 우버, 위워크, 에어비앤비로 대표되는 공유경제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3사의 여러 문제점들이 발생되는 모습을 보며 아직 공유경제로 이 공간과 주택의 문제를 해결하기엔 이르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조금씩 논의되고 있는 기본소득 처럼, 공간 또한 '기본주택' 으로 접근하는 것이 차라리 현실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이젠 좀 원룸이라는 공간 형태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갈 길이 너무 멀다. 아파트값은 의미 없어졌다. 대부분의 20~30대는 자력으로 서울에서 집을 살 수 없어졌다. 서울에는 2020년 현재 약 960만이 산다. 우리나라 인구는 약 5180만이다. 서울은 전 국토의 10퍼센트다. 이보다 더 스페이싱이 필요한 곳이 있을까. 서울에서도 슛을 시도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이 긴 오딧세이가 언젠가 끝나면, 나는 나만의 스페이스를 갖게 될까. 갖지 못할 것 같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양귀자의 소설 '원미동 사람들'에서 작가는 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수도 없이 이사를 다니며 얻은 결론은 한 가지, 집이 없으면 희망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희망이란, 서울에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 희망이란 집과 같은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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