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만나면 됩니다
나는 수채화씨를 만나고 싶었다.
뭐 어려울 거 있나? 이리재고 저리재다보면 아무것도 못한다. 만나고 싶으면 그냥 만나면 됩니다.
생각만 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직접 (해)봐야 내가 좋아하는 정도를 알 수 있고, 내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수채화(水彩畵, watercolor painting)는 서양화에서 수채 물감을 안료로 쓴 그림이다. 물을 많이 쓰느냐의 여부로 투명 수채화와 불투명 수채화로 나눈다. 과슈와 아크릴 물감도 수채화 물감의 일종이다. <출처;위키백과>
나는 수채화씨와 초면이었다. 동네 도서관 소장 자료 검색란에 ‘수채화’를 입력하니 수십 권의 책이 정렬되었다. 책을 펼쳐보고 고른 후 대출을 위해 바코드를 찍는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엔 아무 의미도 없던 그가 ‘나의 꽃’이 되는 순간!이다.
세상은 내가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배울 수 있고, 찾을 수 있는 방법을 도처에 친절하게 숨겨놓고 있다. 조금은 호기롭게 조금은 수줍게 ‘똑똑똑’ 노크를 했더니 수채화씨가 반갑게 웃으며 맞이해 주었다.
기본 재료는 물감, 붓, 팔레트, 물통, 수채화 전용지이다. 일단 다이소에서 16절 전문가용 스케치북(200g)을 구매했다. 책에서는 아르쉬나 파브리아노 제품(280~300g)을 추천했다. 지인이 준 파브리아노 용지가 있어 사용해 보았는데 확실히 발색에서 차이가 두드러졌다. 화홍 붓 세트를 구매했다.
물감은 품질에 따라 가격대가 다양했다. 지인에게 미젤로 물감을 빌려 써보았다. 문교 고체물감 24색이 있었으나 고가의 미젤로 미션 골드를 거부할 수 없었다.(미젤로;최고급 원료와 독보적인 기술력으로 업계 최다특허를 보유하고 있으며, 현재 미국, 유럽 등 30여 개 나라에 수출하는 국내 글로벌 미술용품 전문 브랜드)
장인은 연장을 나무라지 않는다지만 보통 사람인 내게 장비빨의 유혹은 강력했다. 물감만은 과욕을 좀 부려 7.5ml 36색을 고심 끝에 구매했다. 팔레트 포함 상품이라 따로 팔레트를 구매하지는 않았다. 다이소에서 긴 도자기 접시를 구매해 팔레트로, 생수 페트병을 잘라 물통으로 쓰고 있다.
수채화는 수채용지에 그려야 한다. 수채용지는 수채화를 그릴 수 있도록 처리가 된 종이이며 본격적인 수채화를 위한 가장 중요한 재료다. 두꺼운 켄트지에도 충분히 수채화가 가능해 학교나 입시에서는 켄트지에 수채화를 그리나, 수채용지와 달리 켄트지는 종이가 약해 몇 번 문지르면 표면이 벗겨지고 발색부터 차이가 난다. 물에도 잘 견디고 컨트롤도 쉬워 켄트지에만 그리다가 수채 전용지에 그림을 그려보면 처음에는 어색해서 그렇지 수채화를 그리는 난이도 자체는 상당히 내려간다. 종이가 좋아야 물감의 발색도 좋고 기법 구사도 자유로운 편이기 때문에, 수채화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는 종이이며 그래서 가장 많은 돈이 들어가는 재료다. <출처;나무위키>
대출 도서의 첫 번째 조건은 내가 보고 그릴 수 있는 책이어야 했다. 꽃과 식물을 좋아해서 보태니컬 아트와 꽃에 관한 책을 빌렸다. 책에 있는 그림을 설명대로 보고 따라 그렸다. 나는 이해되지 않는 것들도 감당해야 했다.
지인들은 내게 물었다.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하고, 같이 그릴 사람이 있어야지 어떻게 혼자 집에서 그림을 그리냐고. ‘뭐가 문제인가요? 하고 싶은 마음 하나로 이미 충분하지 않은 건가요? 저는 그냥 하는데요? 할 수 있고, 하고 있는데요.’
나는 수채화씨가 보고 싶어지면 독서대에 수채화 책을 펼친 후 물통에 물을 채운다. 마스킹테이프를 수채용지 4면 모서리에 붙여 종이가 울지 않게 하고, 여백을 확보한다. 필통에서 지우개와 연필을 꺼내 스케치를 하고 그 위에 하나씩 색을 입힌다.
어떤 것은 그런대로 그려낼 수 있었고 어떤 것은 이걸 그릴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다. 결과물 역시 그랬다. 그런대로 비슷하게 그린 것과 조금 비슷한 것이 태어났다. 어떤 것은 두세 시간, 어떤 것은 서너 시간이 넘게 걸리기도 했다.
1일 1 그림, 매일 작은 그림이라도 하나씩 그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하루는 짧았고 시간을 내서 그림을 그리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12월에 민화를 시작하고는 더 그러했다. ‘아, 오늘 그림을 못 그렸네! 아, 오늘도 글을 못썼네.’ 탄식과 후회가 남았다.
이제는 꾸준히 그리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나는 수채화씨를 오래 곁에 두고 천천히, 은은하게 알아가며 사귀고 싶다. 수채화씨는 화를 내지도, 조바심 내지도, 토라지지도 않고 늘 같은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주고 반겨준다.
좋아하는 것을 하며 느끼는 행복감은 지대하다. 공자는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했다. 나는 수채화씨와의 만남을 즐기고 있다. 이 만남은 오래도록 지속되리란 예감이 든다.
수채화씨, 지금 만나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