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그은 선

: 그 선 너머의 가능성

by 이말리


젊은 시절, 나는 끊임없이 타인의 삶과 내 삶을 저울질했다. 그에 못 미치면 쪼그라들고 남 앞에서 위축되는 나 자신을 보고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들이 반복되었다.


어릴 때 꽤 그림을 잘 그렸었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겨울, 학교 미술 선생님의 도움으로 엄마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림을 배우러 다녔고 고등학교 진학 후 미술부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미대 진학을 꿈꾸었다. 학교 축제에 그림을 전시하는데 미술부도 아닌 친구의 그림을 보고 나는 차마 표현하지 못했지만 타고난다는 것은 저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기가 꺾였다. 그러던 중에 엄마는 미대 진학을 강경하게 반대했고 나는 그 반대를 이기지 못해 미술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 핑계로 어떤 것에도 마음을 내지 못하고 그저 그런 대학에 진학하고 전공과 상관없는 그저 그런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때의 미대 진학 포기는 50평생을 살아오면서 늘 내 마음에 그늘로 자리하면서 내 감정의 발목을 잡았다. 새로운 도전 앞에서 불쑥 고개를 들어 "넌 이것도 포기할 거야"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되었고, 성취의 순간에도 "진짜 원했던 건 이게 아니잖아"라며 기쁨의 날을 무디게 만들었다. 해보지 않은 일에 관심이 생길 때면, 실패의 상상이 먼저 찾아와 시작하기도 전에 마음속 문을 닫게 했다. "다시 흔들릴 바에야 시작하지 말자"는 방어기제가 내 안에 뿌리내려, 가능성의 씨앗이 싹트기도 전에 밟아 없애곤 했다. 새로운 것을 배울 때에도 더 나은 상황으로 옮겨갈 때도 그 경험들이 늘 마음속에서 짐이 되었고, 한 발 내딛는 순간마다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모래주머니를 발목에 매단 채 걷는 것만 같았다.


그 짐을 안고 살아가는 동안 나는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내가 그린 선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난 할 수 없어", "난 타고나지 않았어", "이미 늦었어", "엄마의 반대로 할 수 없었어"라는 말들이 나를 가두는 감옥이 되었다는 것을. 남들과 비교하며 만든 그 선은 내가 그었지만, 그 안에 머무는 것도 그 너머로 가는 것도 역시 내 선택이었다.


40대 초반 즈음에, 시민대학에서 성인 미술 수업을 수강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30년 가까이 붓을 잡지 않았지만, 그 순간 어린 시절의 그 설렘이 다시 찾아왔다. 그리고 뒤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와서 무슨.. 지금 해봐야 아무 소용없잖아."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내가 그은 선을 넘어보기로 했다.

처음엔 어색하고 손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색은 내가 생각한 대로 섞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면서 깨닫게 되었다. 내가 진정으로 그림을 그리지 못했던 이유는 엄마의 반대나 타고난 재능의 부족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부여한 한계, 내가 그어놓은 선 때문이었다.


선택과 책임. 이 두 단어가 내 삶을 바꾸기 시작했다.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기로 '선택'했고, 그 결과로 오는 공허함과 후회는 내가 져야 할 '책임'이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그림을 그리기로 '선택'했고, 서툴지만 그 과정에서 오는 기쁨과 성장통은 내가 받아들여야 할 '책임'이 되었다.


제주에 와서 다시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되었지만 이젠 조바심도 아쉽지도 않다. 언제든지 내가 원하면 다시 그릴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미대에 진학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든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후회가 아니라 그저 하나의 가능성으로 바라본다. 정말 원하면 지금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내가 그은 선은 이제 나를 가두는 경계가 아니라, 내가 넘어설 수 있는 도전이 되었다.


삶은 내가 선택하고 책임진 결과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다만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명료하게 알고 그에 따른 책임을 기꺼이 질 수 있다면 그 어떤 삶이어도 좋다. 남과 비교하며 그은 선,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은 선, 환경으로 인한 한계 때문에 그은 그 모든 선은 스스로 그었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것도 나와 당신이다.


나는 50여 년을 살아오며 깨달았다. 진정한 자유는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는 것을. 그리고 그 책임 속에서 우리는 성장한다. 그래서 그 선택과 책임으로 인해 내 어깨 위에 어느 만큼의 무게가 있는지 알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 어쩌면 인생의 모든 순간은 선택이고, 모든 순간이 책임이다. 그 선택과 책임의 순간들이 모여 우리의 삶이 된다.


당신의 삶에 그어진 선이 있다면, 그것이 누가 그었든 간에, 그 선을 넘어설 수 있는 힘도 당신 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길 바란다. 늦은 때란 없다.

오직 지금이 있을 뿐이다.







당신의 캔버스에 그어진 모든 선은 한계가 아닌 새로운 시작점일 수 있습니다.

오늘, 어떤 선을 넘어보시겠습니까?


다음 글에서는, 내 마음 안에 머물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해요.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내 고요해지는 감정들,

솔바람처럼 스쳐가는 가벼운 생각들,

어느 순간 깊이를 알 수 없이 가라앉는 침묵까지.

그 모든 것들이 만들어내는 내면의 풍경을,

당신과 함께 천천히 걸어볼 수 있다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