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파도, 나를 향해 그려나가는 지도

: 흔들림 속에 명료해지는 선택들

by 이말리


취향을 드러내는 순간, 내 안에서는 마음의 파도가 출렁인다. 내가 좋아하는 오래된 영화를 언급할 때,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을 때, 혹은 특별히 아끼는 책이나 향수를 추천할 때마다 묘한 기대와 불안 사이에서 흔들린다.

이 취향이 그들에게 어떻게 읽힐까. 내가 선택한 이 작은 조각들이 그들의 눈에는 어떤 모양으로 비칠까.

클래식 음악과 나의 인연은 오래된 퀼트처럼 천천히 이어져 왔다. 어린 시절 피아노를 배웠지만, 그것은 단지 집안의 분위기를 따르는 일상의 한 조각일 뿐이었다. 성인이 되어서야 클래식의 문이 진짜로 열렸다. 3년 동안 매주 한 번씩, 나는 낯선 이들과 함께 앉아 음악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함께 음악을 듣고 감상평을 하기도 하고 연주회에 가기도 하면서 나의 클래식에 대한 호감을 쌓아갔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쇼팽의 빗방울 같은 선율이 빗소리와 함께 내 마음의 창문을 두드렸다. 6월의 어느 날에는 모차르트의 몰아치는 듯한 피아노소리가 내 이마 위로 쏟아지는 햇살처럼 눈부시게 들려서 황홀했었다.

이런 나의 취향을 말할 때면, 나는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긴장한다. "클래식을 좋아한다고 하면 너무 꾸며낸 것처럼 들릴까?" 하는 의문이 먼저 찾아온다.

어느 날 클래식 음악 모임에서 누군가가 베토벤의 후기 현악 사중주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다. 악장의 구조, 선율의 흐름, 역사적 흐름, 베토벤이 남긴 단어들까지. 나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오보에 소리가 잠깐 들린 것 같았어요.
그 소리가… 마음이 참 편안하더라고요.”

전문적인 언어 대신, 감정의 언어로. 그 순간 느낀 작은 부끄러움은 마치 클래식이라는 바다 앞에서 여전히 얕은 물가에 발만 담그고 있는 나를 마주한 것 같았다. 여전히 지식은 모른 채 단지 좋아하기만 할 뿐이니까.

그때부터 내 취향의 깊이와 진정성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과연 클래식을 '제대로' 즐기고 있는 것일까? 내 감상이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일까?

사실 "충분히 고급스럽게 느껴질까?" 하는 걱정이 가장 먼저 찾아온다. 마치 취향에도 등급이 매겨져 있다는 듯, 나는 내가 가진 것이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빛나는 자신감으로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때때로 작아진다.


때론 "이런 취향을 가졌다는 것이 내 라이프스타일을 너무 드러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마치 불필요한 자기 고백을 하는 것 같아서, 혹은 지나치게 취약한 내면을 열어 보이는 것 같아서 가끔은 당혹스럽다.


취향은 어쩌면 우리 자신의 가장 솔직한 부분을 비추는 거울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은밀한 마음속에서는 "뭐 어쩌라고?" 하는 작은 반항심이 피어오른다. 누가 내 취향을 재단하기라도 한다면,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불꽃이 튄다. 왜냐하면 이 취향은, 이 모든 것은 내가 선택한 나의 것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 취향을 갖기 위해 들인 시간과 노력에 대한 내밀한 우월감도 있다. 아무도 모르는 밤의 깊은 시간, 나는 이 취향을 다듬고 가꾸어 왔다. 마치 영화가 좋아서 명화극장만 보던 내가 영화 마니아들 틈에서 뒤처지지 않으려 수년간 하루에 네 편씩 밤을 새 가며 보고 또 봤던 것처럼. 이런 취향은 쉽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들어진 나만의 정원 같은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그 정원에 발을 들이는 이들에게, 조금은 긴장하면서도, 자부심 어린 안내자가 되기도 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는 오히려 놀라운 순간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누구도 내 취향에 반대 의견을 내지 않고, 감탄의 순간들이 이어질 때. 처음에는 설마? 진짜? 낯설게 느껴지는 그 순간들에, 나는 어색하지만 미소를 머금었다. 마치 오랫동안 감춰두었던 보물을 누군가가 발견하고 그 가치를 알아봐 준 것 같은 기쁨.


그런데 가장 이상한 것은,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내 취향을 부끄러워하며 주눅 드는 순간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건 아마도 내 안의 가장 엄격한 비평가가 깨어나는 순간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가장 취약한 내 자존감이 건드려진 것일 수도 있다. 바로 내가 나를 의심하는 순간, 내가 나의 선택을 신뢰하지 못하는 순간.


취향을 드러내는 일은 결국 자신을 드러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순한 선호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는지에 관한 은밀한 고백 같은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누군가에게 취향을 드러낼 때, 그토록 많은 감정의 파도를 경험하는지도 모른다.

흔히들 중년이 되면 취향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나는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는가 내 취향의 지도를 다시 한번 펼쳐본다. 그 위에 그려진 수많은 길들, 때로는 교차하고 때로는 평행하는 감정의 선들. 가끔 일어나는 접촉사고들까지. 그것은 결코 단순하지 않은, 복잡하고도 기묘한 나만의 풍경일 것이다. 출발지도 목적지도 없는 미완성의 그 지도를 통해, 어쩌면 나는 조금씩 나 자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일지도.







지도를 다시 펼쳐봅니다.

수없이 교차하고 부딪히며 만들어진, 나만의 취향의 길들.

그 안에서 나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나 자신에게 다가가는 중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길 어딘가에서

조용히 함께 걸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