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간호학과에 던져지다 - 3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몸은 편했지만 시간 대비 벌어들이는 수익이 너무 적었다. 한 푼이 아쉬운 내 사정을 알던 동기가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를 추천해 주었다.
2012년 당시 최저시급이 4,580원이었는데, 아웃백은 무려 4,950원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솔깃한 제안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면접장에 들어섰지만, 대기하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며 나는 1차로 위축되고 말았다. 눈에 띄게 예쁘고 잘생긴 동료들 사이에서 한 손으로 거대한 트레이를 가볍게 들고 다니는 서버들의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내가 저걸 들었다간 음식 접시를 다 엎어버리겠구나'라는 확신이 들었고, 미련 없이 홀 지원을 포기했다. 요리 경험이 전무했던 나는 설거지라도 하겠다고 손을 들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주방의 ‘콜드라인(샐러드 담당)’이었다.
레시피만 외우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매니저님의 말에 나는 그렇게 아웃백의 주방으로 입성했다.
대기업의 시스템은 남달랐다. 육류와 해산물용 기름을 엄격히 구분하고, 냉장고에 물건을 넣을 때도 교차오염 방지를 위해 물기가 있는 재료는 반드시 맨 아래 칸에 두는 식이었다.
모든 것이 정해진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그곳은 과연 ‘알바계의 해병대’라 불릴만했다.
일이 고된 만큼 복지도 훌륭했다.
매니저님은 학교 수업을 마치고 온 나를 배려해 마감 업무를 맡겨주셨고, 덕분에 야근 수당과 교통비까지 챙길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시급은 6,300원에서 7,000원까지 올랐다. 2014년 최저시급이 5,210원이었으니, 그 차이가 주는 보람은 상당했다.
하지만 주방 일은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수프와 샐러드가 나가고 그다음 핫라인 파스타와 스테이크가 정해진 시간 내에 순차적으로 나가야 하는 압박감은 대단했다.
특히 크리스마스 같은 날,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빌지 사이에서 재고를 계산하며 주문 수량을 조절하는 일은 매번 한계를 시험하게 했다.
나는 정해진 순서와 원칙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때때로 '눈치껏', '현장 상황에 맞게' 융통성을 발휘해야 하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요리에 서툴러 매 순간 조심스러웠던 내 모습은 선배들이 보기에 꽤나 답답했을 것이다. 그때마다 동갑내기 친구가 "숨 좀 돌리고 오라"며 내 몫까지 커버해 준 덕분에 나는 그 치여 죽을 것 같은 주방에서 간신히 버텨낼 수 있었다.
실습이 시작되면서 체력적인 한계를 느꼈다.
마침 집 근처에 롯데리아가 새로 생겼고, 나는 조금 더 편한 곳으로 옮기기 위해 면접을 본 뒤 아웃백을 그만두려 했다.
하지만 인생은 늘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태클을 걸어온다. 사표를 고민하던 찰나, 부모님 가게의 콘센트가 합선되어 불이 났다.
가게 내부를 집어삼킨 검은 연기 앞에서 우리 집의 평범했던 일상은 순식간에 재가 되어버렸다. 롯데리아 면접 결과나 실습의 피로 따위를 고민할 사치가 사라졌다.
그렇다. 이제부터 내가 우리 집의 가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