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잘 듣고 성실하던 첫 째 아들이 6학년이 되었다. 반에서 아들을 포함해서 딱 두 명만 핸드폰이 없다고 했다. 핸드폰의 패악을 알기에 최대한 늦게 사주고 싶었다. 학원에 출근하다 보면 일명 '와이파이 거지'들이 보인다. 와이파이를 공짜로 사용할 수 있는 상가 주변 계단에 앉아서 게임이나 동영상을 보는 아이들을 이렇게 부른다. 내 자녀가 와이파이 거지가 되는 꼴은 정말 못 참을 것 같았다.
그러다 또래가 하는 걸 혼자 안 하면 소외가 된다고 어서 핸드폰을 사주라는 지인의 충고를 들었다. 결국 여름 방학 때 핸드폰을 사주었다.
패밀리 링크(부모와 연결된 앱)로 핸드폰 사용 시간을 지정할 수 있어서 2시간으로 설정해 주었다. 몇 달은 그렇게 잘 지냈다. 그런데 가을부터였다. 내 핸드폰 비밀번호를 알아내서 제한 시간 잠금을 풀더니 하루에 3, 4, 5시간... 점점 핸드폰 사용시간이 늘어갔다. 책을 좋아해서 이틀에 한 번은 도서관에 다녀오던 녀석이 도서대출 연체가 되어 연락이 왔다.
<돈을 훔치다>
초등 2학년인 막내아이는 유난히 돈을 많이 쓴다. 2학년이 되면서 하루에 2천 원씩 주었다. 초6, 초4 형들도 한 주에 만원씩 용돈을 주니 사실 똑같이 준 셈이다. 그런데 어느 날 막내 아이가
"엄마, 요즘 물가가 올라서 2천 원 주면 콜팝도 못 사 먹어, 그러니까 나도 만원을 한꺼번에 줘"
라고 하는 것이다. '고것참 말도 잘하네' 하며 일주일에 만원씩 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최근에 막내아이 책상에 못 보던 물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미니 레고, 편의점 젤리, 블록, 피겨 등 여러 가지 아이템이 보이기 시작했다. 막내 아이는 설레발을 치며 뽑기가 1등이 나오고 계속 잘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났을 때 지갑에 넣어둔 5만 원권 지폐가 사라진 것을 알았다.
아이 셋을 키우며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누구의 소행이냐고 물어보자 다들 시치미를 뚝 떼었다.
결국 막내 아이가 뽑기로 득템 했다던 물건들을 가져가 문구사 주인에게 물어보았다. 가격이 붙어 있는 것은 뽑기가 아니고 가격이 없어도 좋은 물건은 실제로 뽑기로 뽑은 게 맞다는 것이다. '그 녀석 재주도 좋네~! 뽑기를 얼마나 했을까'라는 생각도 잠시, 도둑질을 한 것에 대한 배신감과 충격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애들 아빠에게 얘기를 해보라고 했다.
이윽고 막내 아이가 울면서 내 품에 안기어 죄송하다고 말했다. 사실 최근에 둘째 형 서랍에서도 3만 원을 가져가서 썼다고 이실직고했다. 우선 안아주면서 매를 들진 않을 거라고 하며, 돈이 얼마가 필요한지 물어보았다.
물가가 올라서 하루에 최소 '3천 원'은 필요하다고 했다. 콜팝도 2500원, 컵떡볶이도 2000원, 소떡소떡도 2500원이다. 학교 급식이 맛이 없어서 배가 고프다는 아이에게 할 말이 없었다.
<나도 엄마를 속이다>
중국에서 가족과 통화할 때 공부하느라 너무 바쁘다고 말하곤 했다. 엄마 편지를 보니 2003년 11월이면 대학3학년 기말고사 준비 기간이기도 하지만, 썸남에게 관심을 가지던 시절인 것 같다.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하얼빈으로 떠났던 오빠가 노동절 일주일 동안 연길에 머물렀다. 매일 만나면서 마음을 열었고 유학생 커플이 되었다.
그리고 하얼빈으로 돌아간 후로도 매일 전자메일을 주고받으며 내가 꿈꾸던 지고지순한 사랑에 빠졌다. 저녁엔 전화 통화를 하고 공강 시간엔 전자메일을 보내며 공부하는 시간 외에 모든 시간을 장거리연애 하는데 쏟아붓고 있었다. 엄마는 내가 감정표현을 하지 않고 전화를 잘 받지 않아 걱정했지만 사실 연애질에 바빴다.
자녀들의 사생활은 존중되어야 한다. 스스로 도전하고 실수하거나 잘못을 하면서 인생을 배워 나가는 것이다. 나는 전능한 신이 아니기에 아이들의 인생을 완벽하게 설계할 수 없다. 부모가 완벽하게 아이를 통제할수록 아이는 더 어긋나고 음지로 숨게 되어 있다.
중국에 가서 엄마와 아빠의 통제에서 벗어나 본 경험은 나에게 엄청 값진 시간이었다. 대학생 때 금, 토, 일 집에 가서 살림하고 포도과수원 일을 도우며 2년을 보냈다. 아마 계속 대학 4년을 그렇게 마쳤다면 나는 마마걸이 되어 연애는커녕, 직장생활도 잘 못했을 것 같다.
<엄마의 연서>
2003년 11월 17일
영아 오늘아침엔 얼음이 제법 두껍게 얼었다 이제 여기도 겨울이야.
어제는 아빠 동창회 모임에서 부부동반 등산을 다녀왔단다.
정선에 있는 억새풀로 유명한 민둥산이었는데
요즘 운동을 안 해서 그런지 지금도 엄마는 다리가 아파서 겨우 걷고 있단다.
얼굴도 퉁퉁 부었어 아무리 힘들어도 얼굴은 안 부었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
엄마도 이제는 늙는가 보구나.
잘 지내고 있지? 요즘 바쁜가 보구나 메일 내용도 짧고 형식적인 것 같은데...
엄만 이제 수업 마치고 올라가면서 중근이 데리고 들어가야겠기에 도서관에 온 거란다.
시간이 많을 줄 알았는데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좋은 꿈 꾸고 잘 자고 내일 또 보자 안녕
2003년 11월 20일
비가 온다 비 온 뒤는 추워진다는 일기예보에 오늘은 배추를 뽑아서 저장하기로 했단다.
어제저녁에 전화했더니 계속 통화 중 걸리더라 3번 정도 시도하다가 안돼서 조금 있다가
한번 더 해봐야지 하다가 잠들어서 눈뜨니 아침이더라. 덕분에 씻지도 못하고 잤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