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라반 Jul 19. 2017

눈 치우기와 운동장에 줄긋기

<한국의 명수필>과 <모모>

한 어린아이가 눈이 쌓인 운동장을 걸었다. 어린이는 저 끝까지 일직선으로 걷고 싶었다. 곧게 뻗은 자신의 발자국을 보고 싶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뒤를 돌아 찍힌 발자국을 보며 조심조심 걸었다.


저 어린이의 세심한 주의에도 불구하고, 발자국이 곳곳에서 구부러진 데에는 분명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저 어린이가 만일 운동장 저편에 서 있는 큰 포플러나무나 또는 전신주를 일정한 목표로 삼고 그것만을 향하여 한결같이 걸어갔더라면 저 어린이의 발자국의 줄은 매우 곧게 되었을 것이다. -122쪽(<한국의 명수필>에서 '초설에 부쳐서', 유달영)


운동장에 줄을 그을 때는 땅을 보지 않고 저 멀리 목표점을 정해 나아가야 한다. 그러면 좀 더 반듯한 선을 그을 수 있다.


"길 전체를 한꺼번에 생각하면 안 돼, 알겠니? 오로지 한 걸음, 다음 숨 한 번, 다음엔 비질 한 번만 생각해야 돼. 이렇게 끊임없이 다음 번의 동작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 문득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서 그 아득한 길이 닦여졌다는 것을 깨닫게 돼. 그 전엔 길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도저히 깨달을 수 없었거든. 그걸 알고 나면 숨이 차지 않게 돼." -49쪽(<모모>, 미하엘 엔데, 동서문화사, 2012)


강원도 철원에서 군생활을 할 때, 눈 오는 게 지옥같이 싫었다. 눈이 왔다 하면 어마어마하게 내리는 데다가, 우리 부대가 맡은 범위는 산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때 나와 부대원들은 산 전체를 생각하지 않고 내 싸리비 앞의 눈만 쓸었다. 까마득한 제설도 기어이 끝난다. 


저 멀리 목표점을 정하고 그것만 바라보며 달려도 되고, 내 발 앞만 보며 쓸어가도 된다. 중요한 건 '내가 운동장에 줄을 긋고 있는지', '비질을 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근데, 아무리 발 앞만 본다고 해도 강원도에서 눈 치우기는 끔찍했다.

작가의 이전글 늙은 소녀의 별을 노래하는 마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