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서 책을 펴두고 슥슥ㅡ 쉬운 그림부터 따라 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힐끔거리던 엄마가 말을 걸어왔다.
"뭐하고있어~??"
"그림 그려보고 싶어서 해보는 중이야"
"진짜~~! 엄마 학교 다닐 때 미술부였는데!"
???
한 지붕 아래서 밥도 같이 먹고 오랜 시간을 지내왔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엄마는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미대에 가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시대 분위기상, 4남매 중 장녀인 엄마는 동생들 뒷바라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하고싶은 일들을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둔채로.
엄마는 토할 만큼 지겹도록 선 긋기만 반복하던 연습, 석고상을 앞에 두고 묵묵히 소묘를 하던 미술시간, 미술 선생님에게 칭찬받았을 때의 기분까지,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웃으면서 이야기를 풀어냈다.
으레 나이가 들면 늘어나는 주름만큼 감정도 푸석해지고 마음이 메말라간다고 생각해왔다. 현실에 치여 사느라 무슨 감정이 남아있겠나. 마냥 무뎌진 줄로만 알았다. 무의식적으로, 엄마도 그럴 것이라 여겨왔다.
하지만 추억에 잠겨 재잘재잘 말하는 엄마에게서 문득 소녀 같은 모습이 겹쳐 보였다.
무언가를 순수하게 좋아하는, 동심을 품은 아이가 그 자리에 있었다.
"엄마도 해볼래?"
그렇게 한동안 엄마와 마주앉아 서툰 그림을 그려갔다.
밖은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했고, 거실은 창 너머로 들어오는 노을빛으로 물들어갔다.
같이 TV를 보면서도 별다른 대화 없이 지나가던 날들이 많았는데,
그림 하나로 엄마의 또 다른 얼굴을 볼 수 있었던 따뜻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