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포가는 길’에서 영달이와 백화 중 누가 먼저 꼬셨냐?를 묻던 문학 시험 60점 받던 학생의 질문은 선생이 준비한 내용보다 더 단순하고 깊었다. 그 질문을 끌어올 수 있는 내용을 찾고 읽도록 하는 것이 선생의 몫이었다. 학생의 질문을 허용하고 논쟁만 살짝 부치기만 하면 성공이었다. 마른 소나무 가지는 부채질이 없어도 활활 타오르듯 학생들은 몰입했다. 강간을 미화하는 ‘메밀꽃 필 무렵’을 왜 배워야 하냐고 항의하던 10년 전의 학생은 사라졌다. 수업이 적막하다. 수업 내용과 상관없는 말을 툭툭 던져서 수업이 지연되거나, 선생을 공격하는 순간을 예능 프로 보듯이 재미있어한다. 생각하는 학생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싹둑싹둑 가위질에 소나무의 덥수룩한 머리카락이 잘려나간다. 비로소 상쾌한 봄을 느낀다. 가위질을 처음 할 때는 여린 가지 위주로 머뭇거리며 자르다가, 가위질에 미치면 더 많은 여린 가지들을 잘랐다. 마구 자르다 보니 줄기에 잎이 하나도 남지 않은 가지가 보인다. 내가 뭐 한 거지? 겨울의 추위를 이기고 새순을 밀어 올린 나무에게 미안하고 어설픈 내 의지가 부끄러워 가위질을 할 마음이 사라졌다. 봄에 가지치기를 하지 않으면, 통풍이 되지 않아 거미줄과 뒤엉켜 무더위에는 벌레가 신나게 집을 짓는 것을 보았기에 다시 용기를 낸다. 이렇게 목이 잘린 가지로 수업료를 치르며 가위를 들 땐, 여린 가지가 아니라 직선으로 뻗은 강한 가지를 쳐야 공간이 만들어지고, 그 공간에 뻗어나갈 나무의 미래를 상상하며 그림을 그리면서 가위질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수업하는 삶을 복원하기 위해 가위를 들었다.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들을 교실 통풍을 방해하는 강한 가지로 여겼다. 이 학생들을 보기 좋게 가지치기를 하면, 다시 풍성한 말잔치의 수업이 살아날 것이라 확신했다. 3월 첫날부터 엎어져 자던 학생을 깨웠더니 욕이 돌아왔다. 가위질을 할 작정을 했기에 내 태도는 단호했다. 교무수첩에 말과 행동을 기록하여 사실확인서를 작성하여 학생부로 넘겼다. 결과는 실패였다. 방해하는 학생들을 딴짓 못하게 하려고 하는 선생의 말과 행동은 오히려 그들의 목소리만 더 도드라지게 했다. 수업은 또 방향을 잃고 꼬였다. 아무 말 없이 수업을 버티던 학생이 딴소리를 하는 학생을 보며 웃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이 좋아했기에 수업 방해를 할 수 있었다.
교실에서 내가 잘라내야 할 가지는 도대체 뭐지? 가위는 들었으나 아무것도 자르지 못하고 시간은 흘렀다. 중간고사에서 또 내가 낸 문제가 문제가 되었다. 애매한 문제를 피해 가자는 의견을 무시하고 문제해설서를 쓰면서 버텼다. 교과서에 없는 소설로 읽기 수업을 하고 수행평가도 치렀다. 학생들은 어렵다고 아우성친 것과 달리 또박또박 쓴 나름의 생각이 담긴 답안을 보며, 이것을 어떻게 살려낼까를 고민하면 될 듯해서 흐뭇했다. 나름 희망을 느끼고 있는 순간에 또 한 분의 선생님이 학교 문제로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눈과 귀가 저절로 그 아픔에 빠져든다. 잊고 있던 상처가 되살아난다. 30년이 넘은 학교생활에서 겪은 아픔은 웬만하면 잊는다. 아마 그래도 학교에 남고 싶었기에 저절로 그랬나 보다. 잘못을 가리기 전에 아픈 사람은 누군가가 편들어줘야 살아갈 용기가 생긴다. 예전에는 선생 편은 학생들이 들어줬다. 논거가 어설픈 주장과 설명을 마구 늘어놓아도 “저 선생은 학생을 위하는 분”이라는 말만 들으면, 신이 나서 학교에서 가위질을 했었다. 이 관계를 되찾아야 학교에 희망이 있다. 다른 분들은 좀 목소리를 낮췄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