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의 추락

by 뚜벅뚜벅

고집불통 여교사의 교단일기~어느 날의 추락


또 새벽 3시다. 예고 없이 불이 켜지듯 눈이 떠진다. 출근할 생각에 잠은 오지 않아도 눈을 감고 누워있으면 쉬는 것이라 다독이며 5시 30분까지 버티곤 했었다. 돌이켜 보니 열흘 간의 한가위 연휴를 지내고는 내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병원만 세 군데를 돌아다니며 약을 때려 부으며 버텼다. 그러다 11월 첫째 주를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31년 동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학교이고 내 일상은 수업을 위한 준비였던 생활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이렇게 쉬울 줄이야.


공문 한 장을 결재받기 위해 열흘 전부터 제목을 찾아 초안을 써놓아야 안심이 되었었고, 시험 진도를 못 맞출까 봐 수업진도공책에 날짜와 내용을 적고 색깔 볼펜으로 표시를 한 공책을 몇 번이나 봐야 안심이 되었었다. 나는 학교에서 편안하게 의논하고 함께할 수 있는 동료 선생이 못 된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파일을 쓰지 않으며, 교과서 외의 작품을 더 의욕적으로 수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위험천만한 선생이다. 10년 전에는 내가 쓸 자료를 인쇄해서 주면, 의미 있는 수업이 되겠다며 동료 선생들도 함께 했었다. 그러나 이젠 그분들이 대략 학교를 떠나거나 관리자가 되었다. 그러니 문제가 생기면 혼자 뒤집어 써야 한다.


어려운 단원은 넘어가면 되고, 까다로운 시험문제는 바꾸면 되고, 남은 교과서 진도는 안 해도 된다. 내 자식이 100점만 맞으면 학부모도 학생도 아무 문제 삼지 않는다. 그래서 중학교 시험은 날이 갈수록 쉽다. 이것은 학교 교육이 무력화되는 지름길이다. 배우는 양이 부족하면 배우려는 학생들은 학교밖에 기댈 수밖에 없는 구조를 선생이 앞장서서 만드는 꼴이라는 생각에 더 의욕적으로 타협을 거부했었다. 교단생활의 마지막까지 의미 있는 배움을 설계하는 선생으로 남고 싶다는 내 바람은 이젠 학교에는 척박한 현실을 모르는 낡아빠진 구세대의 외침이었다.


“학부모가 오늘 11시에 중간고사 19번 문제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질문할 것이 있다고 온다고 합니다. 선생님, 미리 답변 준비해 주세요. 학생에게 허락을 다 받고 질문하러 온다고 합니다.”


교감선생님은 출근하자마자 나를 찾았다. 별로 까다로운 문제도 아니라 답변을 준비할 내용도 없었다. 한가위 연휴가 무척 길었다며 잘 지냈냐며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이런 사람이 더 무섭다. 자기는 예의를 다 갖추는 교양 있는 사람이다. 네가 무시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이 아니라는 선전포고 같았다. 그리곤 학부모가 먼저 자기 말을 들어달라고 했다. 소설에 쓰인 표현을 보고 시대적 상황을 추리하는 문제였다. 1.4 후퇴, 6.25 전쟁이라는 표현으로 1950년대 이후로 해석되는 문제였다. 학부모는 자기 주변의 사람들에게 6.25 전쟁은 종전까지 생각해야 하니까 1953년으로 해석될 수 있기에 1950년대 이후는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내가 이 학부모의 이런 주장까지 듣고 있어야 하는지가 이해되지 않았다. 나와 수업하는 학생과 소설을 읽으며 같이 해석한 내용을 시험문제로 냈는데, 해당 학생이 이 문제 하나를 틀려서 100점을 맞지 못했다고 꼬투리를 잡아서 주장하는 말을 내가 왜 설득시켜야 하는지를 납득할 수 없었다. 나는 몇 번을 설명하다가 학부모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 후, 수업 종이 쳐서 민원실의 자리를 떠났다.


다음날 또 출근하자마자 교감은 나를 불렀다.


“선생님의 주장이 100% 옳은 것은 아니니까, 학부모의 주장을 인정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복수정답을 해도 절차는 간단합니다. 그리고 자리를 떠나면서까지 선생님이 기분 나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이렇게 공손한 학부모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워요. 그건 선생님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결정은 선생님이 내리는 거니까 심사숙고해서 결정하세요.”


또 돌려서 친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겪을 때마다 내성이 생기지 않았다. 이 일을 겪고 한 달도 되지 않아 3학년 부장이 병원에 가기 위해 5교시 수업만 하고 조퇴를 하려는 나에게 “수행평가 점수 때문에 학부모가 담임한테 항의해서 교감선생님께 말씀드리는 것 같던데, 교감선생님께 아무 말 못 들었어요?”라고 했다. 나는 이 순간 학교에 남아 있던 마지막 미련이 끊어지는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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