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어리다. 무엇이든 어리다. 반 90의 나도 봄을 맞은 지금은 올해의 가장 어린 나다. 봄은 그런 이미지다.
‘봄’이라는 단어를 놓고 보자니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대략 열 살쯤? 그 아이는 들을 뛰어다닌다. 뛰어다니다가 풀썩 앉는다. 봄 햇볕을 등에 얹고 한참을 꼼지락꼼지락한다. 그사이 바람도 불며 지나가고, 멀리서 새들이 떠들며 자기 볼일 하나씩을 마친다. 곧 그 아이가 웅크린 채로 발만 몇 걸음 옮겨 자리를 바꾼다. 한 어른이 지나다가 그 아이에게 뭐라뭐라 말을 건넨다. 아이는 어른에게 자기 옆에 놓아뒀던 작은 바구니를 들어 보인다. 어른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짧게 웃더니 또 뭐라뭐라 하고 가던 길을 이어 간다. 아이는 자기 앞의 밭에도 망설이는 기색 없이 들어가 바닥을 살핀다. 마땅치 않은지 거기서 나와 길을 따라간다. 가다가 밭둑 중간에 또 풀썩 앉는다. 손이 나름 바쁘다. 바구니가 아까보다 조금 더 찬 것도 같다. 어린 나의 곁으로 다른 여자아이가 다가온다. 커다랗고 파란 플라스틱 장바구니를 든 열두어 살의 소녀. 쪼그리고 있던 아이는 반가운지 벌떡 일어난다. 그때 갑자기 나이 많은 아이가 껑충 뛰더니 혼비백산하여 도망간다. 내가 선 채로 와앙 울음을 터뜨린다. 도망간 소녀가 떨친 파란 플라스틱 장바구니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엎어져 있다. 눈물범벅으로 질린 얼굴의 나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본다. 조심조심 바구니를 챙겨들자마자 홀짝홀짝 자리를 뜬다. 내쳐 달린다. 달리다가 돌아오던 나이 많은 소녀와 마주친다. 소녀는 긴 막대기를 들고 있다. 소녀가 앞장서고 나는 따른다. 소녀는 자기가 떠났던 자리 근처에서부터 막대기로 여기저기 살살 찔러본다. 두 아이가 조심조심 전진한다. 파란 플라스틱 장바구니에 이르자 소녀가 잽싸게 낚아챈다. 그리고 눈깜짝할 새 뒤돌아 뛴다. 어린 나를 앞질러 뛴다. 나도 소스라쳐 뒤를 쫓는다. 함께 달린다. 발이 가볍다. 어린 내가 이제 막 꽃들이 피어나는 키작은 복숭아나무를 보고 멈춰 선다. 멀찍하니 앞서가는 소녀를 부른다. 뛰던 소녀가 속도를 늦추어 나무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둘이 나무 곁에서 한참을 서성인다. 서성이며 논다. 아이들이 까르르 웃는 소리 사이사이를 벌들이 붕붕 날갯짓하는 소리가 매꾼다. 꽃을 쓰다듬고 들여다보고 코끝을 대어 보던 내가 서슴없이 가지 하나를 꺾는다. 소녀는 나보다 더 높은 가지 두어 개를 꺾는다. 두 아이의 걸음이 집들이 모인 쪽으로 향한다. 나의 작은 바구니에는 얼마간의 푸릇한 무엇과 복숭아꽃 줄기가 길게, 소녀의 파란 플라스틱 장바구니에는 오로지 복숭아꽃 줄기 두어 가지가 길게 담겼다. 어린 나의 어깨가 살짝 솟은 것이 자못 의기양양하다. 소녀의 뒷모습은 뭐랄까.. 단지 명랑하다. 두 아이가 또 뛴다. 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는 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조차 모조리 약동하는 계절이다. 봄이란 모름지기.
작년에 꺾이고 이제 막 반 90의 후반에 들었다. 이제는 봄따위 아무 감흥 없이 지나려나.. 불과 몇일 전까지 든 생각이다. 하지만 어제 거실에 무단으로 들어온 햇살이, ‘누가 봐도 내가 봄이오~~!’ 외쳐대는 그 햇살이 내 심장 귀퉁이를 붙잡아 나를 아침부터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그러니 믿어본다. 이번 봄에도 나는 약동한다고. 두근두근 꿈틀꿈틀 팔딱팔딱. 바야흐로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