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균실 생활 일기

11일 차 [2022년 12월 24일]

by 온기

눌은 에너지 넘치는 아이였다.

질주본능이 있어서 뛰고 또 뛰는 아이였다.

집에서도 발이 바닥에 별로 붙어있지 않았다.

거실에 용암이 흐른다며 가구들을 넘어 다니며 노는 그런 아이였다.

얘는 무조건 운동선수를 시켜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유치원에서 하원하고 보면 멍이 한 두 개 나있을 때도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팔뚝 안쪽에 생긴 500원 동전만큼 커다란 멍을 보기 전까지는.

”여기 어쩌다 다쳤어? 안 아팠어? “

“몰라요. 아프지 않았어요.”

담임선생님께 물어봐도 모르는 눈치였다.

날이 갈수록 멍이 점점 자주 생기는 것 같았다. 왜 다쳤는지도, 언제 다쳤는지도 모르는 아이.


유치원에 가려고 세수하던 눌이 코피가 났다.

우리 가족은 다 비염을 달고 살아서 오늘은 얘, 내일은 쟤가 코피가 나는 집이었다.

건조해서 그럴 거라며 휴지로 코를 막아주고 유치원버스에 태워 보냈다.

점심때쯤 유치원에서 눌이 코피가 멎지 않는다고 전화가 왔다.

2시간 이상 코피가 멈추지 않았다는 것.

유치원에 아이를 데리러 가보니 아침의 모습과는 다르게 눌은 기운이 없어 보였다.

다른 활동은 하지 못하고 계속 선생님 무릎에만 앉아있었다고 한다.

소아과를 갔다.

접수처에서 아이를 본 간호사가 이비인후과로 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알겠다고 하고 나오려는데 진료실 문 틈으로 의사가 눌을 보고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얘가 왜 이렇게 창백해요?”

“네? 아이가 창백해요?”

“네. 큰 병원 가서 피검사 한 번 받아보세요.”

갑자기 목이 조이고 등 중앙으로부터 차갑고 소름 끼치는 무언가가 확 하고 퍼지는 기분이 들었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경우는 아니겠지…

눌은 이비인후과에서 치료를 받고 그날 저녁은 코피가 머졌다.


12월 24일. 소아과전문병원으로 온 가족이 출동했다. 성탄절이브니 피검사 끝나면 외식도 하고 맛있는 케이크를 사가지고 집에 돌아갈 계획이었다.

의사는 아이가 비염과 알레르기가 있는 거 같다며 피검사를 하자고 했다.

피검사를 하고, 다음 진료 예약을 하고, 1층 편의점으로 내려와 아이들은 군것질을 기분 좋게 고르고 있었다.

뭘 살지 고민하며 재잘재잘 떠드는 아이들 틈에서 나도 초콜릿을 고르고 있는데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눌 어머니시죠? 빨리 병원으로 올라오세요. 선생님이 급히 보자고 하시네요.”

설마….

“지금 바로 대학병원으로 가세요. 소견서 써드릴게요. oo병원이랑 ㅁㅁ병원 중에 어디가 좋으시겠어요?”

“두 병원이 뭐가 다른 거죠?”

“ㅁㅁ병원엔 종양과가 없을 텐데?”

우리 집은 그야말로 화평했다. 부족함 없이, 불평 없이, 화목하고 사이좋은 집.

살다 보면 위기도 있고 갈등도 있을 거라 생각하긴 했다. 기껏해야 애들 사춘기 정도.

그런데 아이가 아프단다. 대학병원에 가야 할 만큼. 종양이란 말을 듣게 될 줄 몰랐다.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닥치니 눈물만 나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소견서를 받고 울면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1층 문이 열렸고 남편이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응급실내 격리실은 약간 썰렁했다. 입원을 위해 PCR검사를 하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아이가 힘들어하지 않았어요?”

아이의 검사지를 본 의사마다 하는 말이었다.

모든 게 내 잘못 같았다. 내가 너무 무신경했나? 혹시 내가 아이에게 병이 생기게 할 만한 행동을 한건 아닐까?

그런 나에게 의사들은 또 말한다.

“요즘에 백혈병은 거의 치료 가능합니다.”

눌은 백혈병이라는 건가? 다행이라고 생각하라는 건가?

늦은 저녁 입원실로 올라갈 수 있었지만 집에 들렀다가 병원으로 막 오고 있을 남편을 기다렸다.

입원하면 면회가 불가능하기에 크리스마스 아침에 주려고 몰래 사놓았던 선물을 가지러 갔었다.

면회시간은 짧았다. 남편은 눌과 함께 있는 그 일분일초가 소중했던 만큼 아쉽고 속상해했다.

눌은 소아병동으로 입원했다.

소아병동 복도 끝에는 전체가 새하얀 시트지로 도배돼 있고 [격리병동]이라고 빨간 글씨가 새겨져 있는 유리문이 있었다.

그 문이 열리니 복도가 이어져 있었고 병실들이 보였다.

눌의 입원실이었다.

입원하자마자 간호사들이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예쁘게 포장된 선물 꾸러미를 줬다.

고급스러운 팝업책과 돼지인형, 부드러운 극세사 담요.

눌은 신이 났다. 아빠가 선물로 가져온 어린이매니큐어까지 있으니 입원이 좋은 건 줄 아나보다.

아이의 웃는 모습을 보니 같이 따라 웃고는 있었지만 마음은 복잡하고 시끄러웠다.

그날은 평소보다 더 소중히 눌을 끌어안고선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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