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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옥 Aug 15. 2023

유산한 임산부로부터 되려 위로를 받다

만삭 임산부의 따끔한 한마디

"사마라가 요즘 안 보이네요? 출산일이 다가와서 쉬는 건가요?"

"레이나, 주말에만 출근해서 몰랐구나. 사마라 유산했어. 좀 쉬고 다시 나온데."


동병상련

아파본 사람이 아픔을 이해한다. 박사과정 중에 아이를 잃은 경험이 있다.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병원에 누워있는 내가 매우 흥미진진한 안주거리가 되었었다.


공부하다 스트레스받아서 그런 거야.

그러게 공부욕심이 과했어.

애엄마가 무슨 박사를 하겠다고. 

남편 없이 혼자 고생하다가 그렇게 된 거야.

그러게 박사는 아무나 하나.

나 같으면 차라리 애나 잘 키우겠어.

박사 포기하고 한국 갔데.


석박사가 되겠다던 유학생들이 근거도 없는 말을 천리까지 퍼뜨리며 다니는 꼴이 참 한심했다. 이들은 결국 사실과 데이터에 근거한 논문을 잘 써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을까.

 

지금 사마라에게 필요한 것은 근거 없이 숙덕이는 뒷말이 아니라 위로이다.


전화번호

슈퍼바이저에게 사마라 전화번호를 물어봤다. 


"마리아, 사마라 전화번호 좀 알려줄 수 있을까? 위로 전화라도 한번 해줘야 할 것 같아."


사마라와 나는 거의 2년간 하우스키퍼로 같이 일해온 사이지만 아직 서로의 전화번호를 교환한 적이 없다.


미국에서는 어느 정도 사이가 가까워지고 신뢰가 쌓일 때까지 전화번호를 교환하지 않는다. 그리고 타인의 전화번호를 허락 없이 함부로 전달해서도 안된다.


교수가 된 첫 해에, 동료 교수 집에서 파티가 있던 날, 적어두었던 주소를 놓고 나와서 도로에 차를 세우고 학과 사무실로 전화한 적이 있다. 비서에게 동료 교수 전화번호를 물어봤었다. 비서는 그 교수에게 전화해서 레이나에게 번호를 알려줘도 괜찮겠냐고 물어본 후에 번호를 알려주었다. 


"별꼴이야.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매일 얼굴 보는 동료인데 전화번호 하나 갖고 왜 이래?"


유학생활을 8년 동안이나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미국 문화는 처음이라 비서의 태도에 화도 나고 짜증도 났다. 비서는 비서답게 프로페셔널하게 대처했을 뿐이다.


주차할 때 자동차 앞 유리에 전화번호를 적어두는 게 예의인 한국과 달리, 미국은 전화번호 하나까지도 쉽게 나누면 안 되는 철저한 개인주의 사회임을 이런 사소한 문화에서 느낀다. 


위로금

사마라는 생각보다 목소리가 밝았고, 흔쾌히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약속한 시간에 사마라의 집 앞에 도착했다. 빈손으로 갈 수는 없어서 고민을 많이 하다가 은행으로 갔다.

 

미국은 이럴 때 현금보다는 주로 레스토랑 식사권을 준다. 옛날에는 직접 음식을 해서 갖다 주는 문화였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사마라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사마라가 어떤 꽃을 좋아하는지, 혹시 어떤 과일에 알레르기라도 있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취향인지 전혀 모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금이 낫겠다 싶었다.


은행에 도착했을 때 $40과 $50을 두고 갈등을 했었다. 한국에서 병문안 갈 때 봉투에 5만 원이냐 10만 원이냐 그 이상을 넣느냐를 고민하듯이 말이다.

미국은 $20짜리 지폐를 쓰다 보니, $20만 넣자니 너무 적은 것 같고 $60은 주려다 마는 것 같고, 그렇다고 $100은 오버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50짜리로 달라고 했다.

선입견

선생이 되고자 하는 교육대 학생들에게 늘 선입견이 얼마나 위험한지 경고 수준으로 떠들어대며 가르쳐왔다.

동양인이니까 수학을 무조건 잘할 거야.

흑인이라 집중도 못하고 시끄럽고 문제만 일으킬 거야.

히스패닉이라 집안이 가난하고 부모가 학업에는 관심이 없을 거야.

금발이라 멍청할 거야.


"너희들 말이야, 이런 선입견이나 편견을 갖고 있다면 선생이 될 자격이 없어. 편견을 깨던지, 아이들의 미래를 망치느니 차라리 지금 전공을 바꾸도록 해."

  

이랬던 내가 사마라가 히잡을 쓰고 다니는 청소부라서 무엇보다 현금이 더 절실할 것이라 오해했다.

솔직히 나만은 절대 아니라 부정하고 싶었던 그 선입견이 나에게도 내재되어 있었다는 걸 고백한다.


싸구려 동정

사마라가 반갑게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가 히잡을 벗은 모습은 처음 봤다.

나를 소파에 앉히고 준비해 둔 물과 대추를 들고 나왔다. 벌떡 일어나 쟁반을 받으려니, 손님은 가만히 앉아있으라 했다. 그녀는 완곡했다.


사마라의 집은 무게가 있는 고급 가구들로 채워져 있었다. 컴퓨터 모니터가 큰 게 두 개나 있는 남편의 오피스, 묵직한 식탁, 푹신한 고급 카펫, 최신식 스테인 냉장고... 우리 집에는 없는 것들이 솔직히는 부럽기까지 했다.

딱딱하고 차가운 가죽소파에 앉았는데 우리 집에 있는 천소파에 앉았을 때 보다 왠지 더 포근하게 느껴졌다. 


"에잇, 그깟 $50짜리 준비하면서 무슨 생각을 한 게야."


히잡을 둘러쓰고 만삭이 되도록 청소를 하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연민을 느꼈었다. 큰맘 먹고 봉투에 $50을 넣었던 내 손과 마음이 부끄러웠다. 사마라에게 정말 현금이 필요했을 거라 생각했으면 $50이 아니라 $100을 넣었어야 했다. 그 $50은 순순한 연민이 아니라 싸구려 동정이었던 것이다. 사마라에겐 동정 따윈 필요한 게 아니었다.


푹 쉬어야 할 몸이라 오래 앉아있으면 실례일 것 같았다. 간단히 위로를 하고 물을 다 마시고 일어나려는데 나를 부엌으로 끌고 갔다.


오븐에서 갓 구운 빵을 꺼내었다.


"사마라, 지금 오후 세시야. 나 배고프지는 않은데."


손님에게 물과 음식을 대접하는 게 이슬람 문화라며 식탁 위로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커피에 빵 정도는 먹을 수 있는데, 오후 세시에 음식을 내오는데 거절할 수 도 없고 당황스러웠다. 

방금 퇴원한 사람 같이 않게 행동이 능숙하고 빨랐다. 마음과 몸이 매우 힘들 텐데 내가 온다고 음식을 준비했다니 감동이다. 위를 늘려서라도 접시를 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 가서 변기 끌어 앉고 다 토해내더라도 절대 취하지 않고 상사의 술을 받아주던 더럽고 치사한 고문 수준의 회식문화가 생각났다. 신성한 음식 앞에서 이런 생각까지는 하고 싶지 않지만 축적된 기억은 이런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식고문이라 생각하면 못 먹을 것도 없다.


집에 가서 설사를 하던 토해내던 일단 먹어야겠다 생각을 하고 포크를 들었다. 사마라의 정성 때문인지 정말 위가 늘어나기라도 한 듯 잘도 넘어갔다. 배가 고프지도 않았는데 놀랍게도 나는 그 많은 음식이 담긴 접시를 깨끗하게 비웠다. 역시 훌륭한 나의 식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이민과 영어

음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둘 다 미국 시민이 아니기에, 가장 자연스러운 대화는 어떻게 미국에 왔으며, 미국에 온 지 몇 년 차인지, 지금 무슨 비자를 소지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디에 정착을 할 것인지, 어떻게 살 것인지 등이다. 


사마라의 남편은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다. 석사를 마친 후 우리 동네에 한 회사의 연구원으로 취직이 되어 이사를 왔다고 한다.


어떻게 하다가 호텔에서 일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했다.


"내가 살던 곳에서는 여자들은 일 안 해. 여기 와서 보니 미국은 여자들은 다 나가서 일하고 돈을 벌더라고. 나도 처음에 여기 와서 친구도 없고 애들 학교 보내놓고 집에만 있으려니 심심해서 뭘 해볼까 알아보다가 여기저기 지원하게 된 거야."


그녀는 히잡을 쓰고 자신의 종교와 문화를 지키면서 동시에 미국화가 되어가려고 노력 중이다.


"내 영어실력으로는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더라고. 아무리 인종차별이 없다고 해도 히잡을 쓰면 얼굴이 보이는 일은 찾기가 힘들어. 지원하고 면접도 봤었는데 날 뽑아주진 않더라고. 마리아는 인터뷰 보더니 다음날부터 나오라 해서 여기서 일하게 된 거야."


치유

그렇게 만삭이 되도록 일을 했어야만 했는지 궁금해졌다. 출산을 앞두고 언제까지 일하려고 했는지 조심스레 물어봤다. 


"임산부는 환자가 아니야. 2주 남기고 쉬려고 했지."


임산부는 소중한 생명을 출산해야 하니 보호해 주고 배려를 해주는 게 맞다. 하지만 모든 하던 일을 중단하고 쉬어야 할 만큼의 환자가 아니라는 그 마인드는 정말 신선했다. 여자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문화에서 자란 사마라는 히잡을 썼을 뿐, 내가 만나온 그 어느 여인들보다 진보적이며 강하고 대담하다.


"내가 일해서 유산한 게 아니야. 신의 뜻이었어. 내가 집에서 쉬었어도 유산될 아이였어."


사마라를 위로하러 다녀온다는 게 되려 내가 위로를 받고 왔다. 사마라가 언니처럼 느껴졌다. 단 한 명이라도 나에게 유산은 임산부의 잘못이 아니라고 얘기해 주고 위로해 주었으면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까. 그때 그렇게 나 자신을 책망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들키지 않으려 눈물도 흘리지 못했던 죄책감을 13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사마라를 통해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다.


"내가 고의로 태아를 포기한 건 아니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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