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구성이 뛰어난 '판소리계의 윤심덕'

국악인 안향련

by 명랑낙타



글을 쓰는 중에 윤석화의 부고가 날아들었다. 당황스러웠다. 멈추고 방향을 바꿔야 하나.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난번 이순재도 김지미도 그랬듯 윤석화도 언론마다 부고가 차고 넘쳤다. 비중 있는 배우들이라 관심도 많았을 것이다.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떠나는 것도 복 받은 것이다. 그런 대우를 받지 못하고 눈 감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니다. 이순재,김지미 그리고 윤석화의 부고 더미에 내 부고 한 장을 더 올려놓는다고 세상이 달라질 것은 없다. 훗날 그들이 사무치게 그리우면 그때 쓰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오늘은 국악인 안향련의 기일이다. 생소한 이름이다. 1981년 떠났으니 44주기. 향년 37세. 요절. 극단적 선택. 미모. 소설적 요소를 다 갖춘 죽음이었다. 그가 떠난 후 온갖 소문들이 유령처럼 떠돌아다녔다. 타고난 천구성(맑고 고운 소리)에 친가, 외가 할 것 없이 뼈대 있는 소리꾼 집안에 미모까지 출중한 천재 소리꾼이 요절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사회면성 추측기사가 그의 부고를 대신했다. 그는 그런 대접을 받았다.


수면제를 과다복용한 것은 맞는데 왜 그랬는지는 의견이 분분했다. 천재의 요절은 신화가 되어 시간이 흐를수록 그 부피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법이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힘들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판소리계의 윤심덕'이란 얘기가 그래서 나왔다. 거문고를 좋아했던 안향련은 죽음에 이르는 시간, 거문고를 들으며 약을 털어 넣었다. 비록 미완이지만 최명희가 '제망매가'를 쓴 것도 그의 삶 자체가 극적인 요소를 모두 갖췄기 때문이다.


그의 재능을 알고 있던 국악인들은 하나같이 '국악계의 큰 손실' 이라며 애통해했다. 스승 김소희는 안향련을 끔찍이 아꼈다고 한다. 여기저기 다니며 "소리가 나를 뛰어넘는다"며 자랑했다고 한다. 그렇게 아끼던 제자가 떠났으니 스승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을 것이다. 김소희는 영혼을 달래려고 '씻김굿'을 해주었는데 그날, '수많은 명창들이 하나가 되어 무가를 불러재끼니 굿판이 깨질 지경'이었다고 전해진다. 어떤 풍경이었을지 눈에 선하다. 눈물은 바다를 채우고 울음소리는 하늘까지 닿았을 것이다.


그녀가 떠나던 날은 내가 판소리에 첫발을 내 디딜 그즈음이었다. 다른 명창들의 소리에 빠져 안향련을 잘 알지 못했다. 판소리 다섯 바탕을 꽤 열심히 들으면서야 비로소 존재를 알게 됐다. 그의 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그러질 못했다. 음원이 별로 없어서다. 듣기론 다섯 바탕을 모두 배웠다는데 남아있는 것은 흥부가와 심청가, 여기에 춘향가의 '쑥대머리'와 몇 개의 민요가 전부였다. 그때는 그마저도 없었다. 훗날 그를 아끼는 이들이 여기저기서 음원을 찾아 바느질하듯 하나하나 꿰어 흥부가와 심청가를 완성됐다. 음질이 좋지 못은 것은 물론이다.


결혼하던 날, 우리 것을 연구하던 내 친구 K는 선물이라며 박스 하나를 건넸다. 그때는 '귀명창'까지는 아니지만 소리에 추임새를 넣을 정도는 됐었다. 열어보니 안향련의 소리를 담은 카세트테이프 20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듣고 또 듣고 또 들었다. 흥부가도 좋았지만 심청가는 정말 대단했다. 심청가 중 '상여소리'는 들을 때마다 지금도 밀려오는 슬픔을 감당해 내기 어렵다. '남자 명창은 임방울, 여자 명창은 안향련'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책으로 소리를 공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8명창 운운하지만 음원이 없어 듣지 않고는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이게 우리 국악의 현주소다. 정말이지 비루하기 짝이 없는 '문화대국'이다. 그나마 신나라레코드가 있었던 것은 우리 국악, 아니 우리 문화에 '기적'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신나라가 없었다면 더 많은 음원이 사라졌을 것이다. 여기에 뿌리 깊은 나무의 한창기는 하늘이 내려준 보배였다. 그는 판소리를 끔찍이 아꼈다. 내 가슴속에 한창기 이름 석자는 절대 지울 수 없는 이유다.


인향련이 부르는 심청가 중 '인당수에 빠지는 대목'을 듣는다. 진양조로 시작하다 엇모리에 자진모리로 긴박하게 진행되다가 휘몰이로 끝나는 마지막 사설은 그의 죽음만큼 극적이다.


'심청이 거동 봐라 샛별 같은 눈을 감고 치맛자락 무릅쓰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뱃전으로 우루루루 만경창파 갈매기 격으로 떴다 물에가 풍~'


안향련도 그렇게 떠났다.


사족- 일본영화 '국보'를 보았다. 상영관 찾기가 어려웠다. 일본에서는 1300만명이 보았다는데 우리는 흥행이 저조하자 상영관이 점점 줄어 들었다. 겨우 인근 도시 작은 극장을 찾아 겨우 볼 수 있었다. 극장에는 나와 젊은 학생 둘밖에 없었다.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좋았다. 올해 내가 본 영화 중 '세계의 주인'과 함께 최고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에게도 저런 영화가 한편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향련이 떠오른 것도 그때였다. 영화를 찍고 싶어졌다.


영화 덕분에 일본에서는 가부끼를 모르던 청소년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공연이 매진되는 등 대중적 인기가 높아졌다고 한다. 영화의 위력이다. 영화도 그렇지만 잊혀가는 것들을 다시 꺼내 부흥시키는 그들의 저력이 한없이 부럽다. 우리의 판소리는 어떻게 될까. 부활할 수 있을까. 안향련을 겨우 꺼내 아무도 관심없는 판소리의 미래를 걱정하는 내가 인당수에 빠지는 기분이다. '심봉사 눈뜨는 대목' 아! 이렇게 좋은데...



https://youtu.be/JawJFFE2tX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