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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스칼렛 Aug 14. 2023

나는 아파도 주부고 자유로워도 뼛속 가득 주부다.

혼자만의 짜릿한 주말 외출 + 벗어놓지 못하는 주부의 '티'


초등학교 쌍둥이가 좋아하는 '세계사'와 '한국의 문화유산' 일부 발췌


1. 초등 1학년에게 책을 읽어주다 다 쉬어버린 목소리


며칠 전에 시작된 목감기가 도무지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제는 밤새 기침을 해서 잠도 잘 못 잤는데 오늘은 그마저 나오던 목소리가 다 쉬어버렸다. 방학이라고 다른 공부는 안 시키더라도 책은 열심히 읽어주자는 알랑한 모성애가 화근이었나 보다. 초등학교 1학년인 쌍둥이는 스스로 책을 잘 읽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도 엄마가 읽어주는 책은 열심히 들으려고 하니 어찌 이를 마다할 수 있으랴. 그런데 하필 골라오는 책들이 글밥이 많다. ○원에서 나온 '○○토이 세계사', '호시탐탐 문화유산' 이런 책들을 좋아한다. 권장학년은 아마 고학년일 듯한 내용이다. 1학년이 이런 책을 귀를 쫑긋 세우고 들으니 신기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한데 엄마의 목의 불편함은, 조금씩 정도가 심해지는 따끔따끔함은 초롱초롱 눈을 뜨고 옆에 나란히 앉은 쌍둥이의 집중력에 비하면 내일은 괜찮아질 거라고 쉽게 여길만한 잔부스러기였다.



1학년 방학숙제로 적어가는 '독서록'


 2권만 읽어도 진이 빠질 때가 있는데 방학이라 하루종일 읽은 책들을 독서록에 적어보니 7~8권은 쉽게 넘어간다. 아무리 운동을 많이 하면 무엇하랴. 인바디가 'D'형의 '표준체중 강인형'이 나오면 무엇하랴. 오랜 시간 '갑상선 저하증'을 겪어서인지, 오랜 종교 활동 속 노래하는 것을 좋아해서 성대가 혹사당한 과거의 경험 탓인지 나에게 가장 약한 신체부위는 '성대' 바로 '목구멍'이다. 이제는 가만히 있어도 계속 잔기침이 난다. 나는 침 삼키기도 따가운데 아이들이 불교의 '동자승'처럼 얌전히 있을 리가 없다. 말을 최대한 하지 말아야 하는데 시끌벅적한 집안은 가히 서바이벌의 한 관문 같다. 때마침 '이때다' 싶은 탈출구가 내 눈에 들어왔다.



2. '3시간 30분'의 기적 같은 행복한 자유


애들 아빠도 이렇게 더운 날, 아침에 운동을 길게 하고 와서 힘이 들었던 듯하다. 우리는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며, 어른들도 편하게 쉴 수 있는 방편으로 '영화'를 선택했다. 셋이라 영화 설정 과정에서 티격태격 작은 부딪힘은 있었지만 아직 자막을 빨리 못 읽어 내려가는 8살인 관계로 생각보다 쉽게 한국영화로 채택될 수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아이들이 영화에 한창 몰입되어 있을 때. 나는 살며시 남편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나 교○문고 갔다 와도 돼?"


운동한다고 아침 새벽에 나가 오후 2시쯤에 들어온 남편은 쉽게 허락했다. 내가 곁에 있어봐야 기침소리만 들릴 뿐이니 오히려 자유를 주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 방학이라 동네에 있는 도서관은 자주 갔어도 대형문고에는 안 간지가 꽤 된 시점이었다. 난 룰루랄라 가방을 챙기고 옷도 슬림하게 갈아입었다. 손이 많이 가는 초등1학년 두 명을 포함해서 줄줄이 비엔나처럼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다가 이렇게 혼자서 홀가분하게 나갈 수 있음을... 그 가벼움을... 가히 미혼자분들은 이 즐거움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아마 뭐가 그렇게 대단히 즐거울 일이냐고 묻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보통의 기혼자분들은 공감하지 않을까? 이것은 그냥 그 자체로 축복이요 달콤한 스릴감 같은 것이라는 걸.





운전대를 잡았다. 차 안은 내가 즐기는 나만의 공간이며 나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들이 갖추어진 곳이었다. 이제 음악선정을 해야 했다. 오늘은 'R&B 여가수'를 유튜브로 검색했다. 내가 좋아하는 '박정현', '양파', '박화요비', '애즈원', '윤미래', '재이'가 나왔다. 딱 좋다. 액셀을 밝으며 느끼는 속도감에 음악의 비트와 감미로운 목소리가 얹히면서 더할 나위 없는 겹겹의 즐거움으로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교○문고는 주말이라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멋을 한껏 내고 주말을 즐기러 나온 젊은이들을 구경하는 것은 도심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며칠 전부터 세계명작 소설들을 다시 뽀개보기로 결심하고 '데미안'을 읽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세계 문학'코너에 가서 이런저런 책을 구경하고 다음에 읽을 책들을 상상하며 미리 정해 보는 예행연습은 그 자체로 즐거웠다. 마치 벌써 작가나 소설과의 인연이 닿기 시작이라도 한 것처럼.

 '○라딘'의 중고서점도 갔다. 난 오히려 대형서적의 신간코너보다 이런 중고서적을 뒤지는 것을 좋아한다. 출판된 지는 꽤 되었지만 '베스트셀러'라는 기업의 인위적 홍보 없이 꾸준히 사랑받아온 알짜배기 책들을 골라가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인위로 고른 5개 중에서 선별해서 2개만 결제했다. 맘껏 내키는 대로 골랐더니 집에 책장만 비좁고 먼지만 쌓이는 모습을 보는 것도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책 2개를 찾았다는 사실은 한껏 내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이렇게 혼자 나오면 왜 뭐든 쉽게 즐거워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인지..


때마침 저녁시간이 걸려 '햄버거'를 먹으러 갔다. 패스트푸드면 어떻고 혼자 먹으면 어떠하랴. 혼자 먹고 싶은 햄버거를 배부르게 먹으면 된 것이다. 오직 내 취향에 따라서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르고, 돈 걱정 없이 편하게 결제하고, 단촐하지만 깔끔하게 먹을 수 있는 이 자유와 공간이 그저 행복할 뿐이다.


다시 차를 타고 돌아간다. 주차요금을 내지 않기 위해 '첫째'가 풀려면 한참 기다려야 할 학년의 문제집을 3권이나 사버렸다. 언젠가는 활용할 날이 다가오겠지 하며. 이번엔 클래식이다. 왠지 힘찬 노래가 듣고 싶어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연주한 '쇼팽 연습곡 Op.25의 12곡'을 선정했다. 운전하고 가는 시간이 짧다고 느낄 만큼 음악도 좋고 운전도 수월했다.




3. 집에 도착하기 전, 나는 끝내 장 보러 가는 주부


집에 거의 도착해 가는데, 우리 집이 저기 보이는데, 냉장고에 다 마셔가는 우유가 생각났다. 식구 수대로 먹기에는 부족한 식빵도, 아침에 다 먹어버린 딸기잼도 생각났다. 방학이라 공부라도 시키려면 간식의 꼬드김이 필요한데 뭔가 더 우리 집에 채워져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냥 집에 가면 그만이었다. 오히려 내일은 평일이라 일정 금액이상만 사면 배달아저씨가 편하게 우리 집까지 물건도 옮겨주실 것이었다. 하지만 이 주부의 찜찜함은 내가 좀 불편하더라도, 그 신체적 힘듦에 비해 냉장고가 채워지는 넉넉함이 오히려 나를 안심시켜 주는 그 무엇이었다. 사는 김에 우유도 2.3l로 큰 걸로 사고, 어차피 빨리 먹을 거 요구르트가 많이 달린 유통기한이 좀 짧은 우유 2개, 큰 음료수 2병도 샀다. 몇 개 안 담았는데 벌써 비닐봉지는 무겁다. 집에 올라갈 때 책도 들고 가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도 미루는 것보다는 훨씬 홀가분하다.





4. 짧았지만 임팩트 있었던 외출,

 그렇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주부


음악 들으며 운전도, 책구경도 잘했고 햄버거도 잘 먹었다, 자유를 즐거워하면서도 그 혼자만의 즐거움의 반대편에 있을 아이들과 남편도 생각나는 나는 어쩔 수 없는 주부인가 보다. 오늘 고른 책도 아들에게 권하고 읽히면 좋을 것 같다는 교육적인 의도를 배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큰 갈래는 '화학'과 '역사와 인문학'이다. 내가 저녁을 해결하러 햄버거 집을 갈 때도 아이들과 남편은 어떻게 저녁을 해결할지 전화부터 걸어본다. 다 알아서 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그 자체로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이 즐거운 주말 밤 도심의 번화가였지만 난 내 볼일만 보고 얼른 차에 올라탔다. 세 아들의 혈기왕성한 기운에 등골이 빠지는 남편의 모습이 짐작되기 때문이다. 살랑거리는 원피스에 핸드백만 메고 귀가해도 그만일 텐데 기어코 장을 봐서는 양손 가득 낑낑거리며 귀가했다. 이렇게 나는 짧은 외출도 온전히 자신만 생각하지 못하는, 영락없는 대한민국의 아줌마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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