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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스칼렛 Aug 11. 2023

나의 애증의 영어 일대기

평범한 아줌마의 현재진행 영어가 되기까지

 

나랑 똑같은 방식으로 알파벳을 써보았던 7살 셋째의 글씨


나에게 있어 영어는 사랑할 애(愛)와 미워할 증(憎)을 가진, 양면성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미움과 부끄러움의 흑역사로 시작하였고 현재도 여전히 낯뜨거움의 순간을 불현듯 나에게 안겨주지만 그 이면에는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뜨끈함을 내포한 나의 단짝 친구이다. 그럼 이 친구와의 떼어낼래야 떼어낼 수 없는 질기고도 각별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1. 영어와의 첫 만남


나는 영어를 중학교에 입학하며 처음 만났다. 그 당시 내 주변에는 몇 년간에 걸친 학원수업으로 이미 '교과서 속 영어' 따위는 쉽게 읽어내려가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문방구에서 산 '영어'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진 공책을 처음 사다들고 배포를 부리며 알파벳 대문자와 소문자를 익히기 시작했다. 국민학교(당시에는 초등이 아니였다.) 정규과정에는 당연히 영어가 포함되지 않았기에 알파벳을 알고 중학교에 올라가서 차근차근 영어를 배우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영어 수업의 풍경은 내 예상과 전혀 달랐다. 선생님은 첫 수업부터 지문을 읽어보라고 발표를 시키고 단어 시험을 예고하셨다.


"Hi, Jane.

 Hi, Mike.

 How are you?

 Find. Thank you. And you?"


30년이 훨씬 넘었지만 영어교과서 1단원의 첫 대화를 난 선명히 기억한다. 그만큼 그 때의 기억은 나에게 잊지 못할 강한 충격이었는 듯 싶다. 혼자서 쉬울것이라고 예상한 완만한 영어 입문은 고사하고 실제로는 매시간마다 지문 읽기와 단어 시험의 혹독한 관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 'mouse'가 'o'가 있는데 왜 '마우스'라는 '아'발음으로 부르게 되는건지, 'she'는 'e'가 들어가는데 왜 '쉬'라고 불리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머리 속은 미궁속에서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지만 그 당시 나는 영어 자습서를 사달라고 엄마한테 떼를 쓸 성격도 아니었고 중학교라는 낯선 장소에서 처음으로 만난 친구들에게 물어볼 염치는 더더욱 없었다. 한 단원을 모두 말할 줄 알아야했었지만 겨우 몇 줄만 겨우 더듬더듬 읽을 줄 아는 나에게 영어는 정말 치욕과 공포의 시간이었다.

'제말 발표줄에 걸리지만 말아라'하고 열심히 빌었지만 왜 그렇게 우리 줄만 자주 걸리는 것 같은지. 난 매번 '불합격'이라는 낙오를 남기며 '호박통'이라는 주먹쥔 두손으로 머리를 때리는 벌과 함께 '단어 빡빡이 1장'을 어김없이 제출해야만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반에서 1등하며 자랑스럽게 칭찬도 받았었는데 불과 1년만에 중학교에서 만난 영어라는 과목은 나에게는 초중고를 통틀어 가장 끔찍스럽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안겨줬던 것이다.



2. 수능을 치기 위해 단어만 열심히 외웠던 학창시절


 '중학교 1학년'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이제 발음기호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형편없었던 단어 시험에서는 어느 정도의 성과도 내면서 스스로가 서서히 단련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문법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의 작은 알파벳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철옹성 같은 문법의 세상이.


'도대체 영어는 뭘까?'

'도대체 영어는 왜 하는 걸까?'

'영어는 도대체 나와 무슨 원수를 지은 걸까?'


정말 가도가도 해결이 안되는 미로 같았다. 한번도 학원을 다닌 경력이 없다는 꼴랑한 자존심으로 혼자서 계속 버티던 나였다. 더욱이 나는 예체능을 목표로 하고 있던 학생이라 시험은 나의 최상의 실력을 검증하는 것이 아닌,  일정 컷트라인만 통과하면 되는 하나의 관문에 불과했다.

실기 연습 시간만으로도 빠듯했기에 영어는 단어만 외우기로 했다. 그 당시 수능에서 오직 문법만 묻는 문제는 2~3개에 불과했었다. 그 점수는 날리기로 했다. 그것 좀 틀려도 단어를 많이 외워서 다른 문제의 정답률을 높이는 것이 더 승산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이런 겉핥기만으로 끝내려는 간사함은 영어를 제대로 내 몸에 각인시키지 못한 채 그렇게 피상적인 가벼운 날림으로 지나가버리게 만들고 말았다.

 조금 더 진득하게, 꾸준하게 기초부터 다졌더라면 앞으로 맞이할 내 영어여정이 조금은 완만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3. 흑역사의 최절정, 영어회화모임에서 퇴짜를 당하다.


그렇게 영어와 오랜시간을 함께 하며 성취감보다는 수치감, 자랑스러움보다는 왠지 모를 꺼림칙한 감정을 더 많이 느껴본 듯 했다. 그런데 난 왜 아직도 영어를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성인이 되고 결혼 이후에는 영어를 못해도 누가 뭐라할 사람도 없었다. 나의 어설픈 영어 실력을 들킬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항상 영어를 잘하고 싶었다. 영어에서 손을 떼기가 싫었다. 이게 무슨 감정일까? 이것이야말로 징글징글한 애증의 관계가 아닐까?

첫 아이를 낳고 5살 터울로 쌍둥이를 낳았다. 출산과 양육의 시간만큼 세상의 상식이나 지식과 멀어져가는 나에게 서서히 환멸이 느껴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현재의 나의 조건에서 나를 구해줄 탈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발견한 '중급영어회화 모임!'

바로 우리동네라 거리나 시간도 괜찮았다. 미리 준비된 철처함 보다는 즉흥적이었던 나의 성격은 별 생각없이, 막상 닥치면 무언가라도 나오겠지 하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하지만 결혼과 양육의 긴 세월이 어디 그냥 흘러갔을까. 나의 예상보다 버벅거림은 심했고 결국 난


"죄송합니다. 함께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희는 중급이상의 사람들로 구성된 영어회화모임입니다."


라는 문자를 보게 되었다.

이게 뭐라고. 맘먹고 찾아보면 다른 영어회화모임도 많은데 그 당시에는 얼마나 서럽고 속상했는지 모른다. 계속 눈물이 났다. 그리고 그런 나 자신이 너무 바보같았다. 똑바로 준비를 못해서 이런 치욕을 겪는 사실에도 화가 났다. 그렇게 여전히 영어는 성인인 나에게도 비참함을 안겨주고 있었던 것이다.



4. 여전히 부족하지만 이제는 함께하며 즐기는 영어


모임에서 튕겨지는 달갑지 않은 상황을 겪은 후, 다시 좀 더 적극적으로, 꼼꼼하게 영어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서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같은 지역 카페에서 '영어 글쓰기'모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력보다는 꾸준히, 성실하게 배우며 노력하겠다는 의지로 깡다구 있게 도전했고 2020년 2월부터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 모임을 통해 많은 분들을 알게 되었다. 특히 영어를 통해 알게 된 분들의 장점이라면 자기의 전공분야나 직장에서 전문적인 경험과 지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영어의 실력유지나 향상을 원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글로벌한 경험이 누적되어 있었고, 앞으로의 보다 진취적인 목표를 위해 독서나 여행, 다른 자격증 획득에도 적극적인 도전을 보이셨다. 실제로 한국에 정기적으로 들르시는 외국인 교민도 회원으로 함께 하고 있다.


 영어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은, 영어로 소통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나의 삶에서 한계가 없는 인간관계의 확장이요, 내가 가볼 수 없었던 지식 세계로의 입문이었다. 내가 만약 영어를 소통의 도구로 활용할 수 없었다면 내가 감히 어떤 루트로 이분들과 엮일 수 있었을까. 그저 동네아줌마, 집과 마트가 주된 이동장소인 전업주부, 아이 셋 키우며 매번 같은 집안일을 반복하는 셋팅 잘 된 로봇처럼 지낼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회의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과 도전을 듣고 자극을 받으며, 사고와 경험을 확장해가는 이 생활이 나는 너무 즐겁다. 그래서 영어에게 고맙다. 가끔 머리가 하얗게 비워지는 당황스러움은 여전히 가끔씩 선사해주고 있지만 그렇기에 나는 끊임없이 도전받고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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